[Project 당신] 한여름에, 오빠에게

글 입력 2024.08.28 18:5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크기변환]비행기.jpg

 

 

소란스럽고 축축한 날들이야. 이런 날씨에 편지를 쓰려니 영 성가시네. 오랜만이야, 오빠. 거긴 날씨가 어떤지 궁금하네. 이 한여름에 7cm 폭설이라니, 참으로 무섭기도 하지. 우리가 엄청 좋아했던 <투모로우>가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어. 그땐 책을 땔감으로 쓰는 장면에 조금 마음이 아팠는데, 이젠 살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태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는. 오빠는 어떤지 모르겠네.


나는 아주 잘 지내. 첫 직장 재밌게 잘 다니고 있고, 월급날이면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그래. 최근에야 알았는데, 나는 사시미보단 숙성회를 좋아하더라. 먹어봤어야 알지.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친구는 적지만 혼자 노는 걸 워낙 좋아해서 괜찮아. 오빠는 거기 친구 없을 것 같아서 진짜 걱정돼. 예전엔 어딜 가나 자랑스러웠는데, 혼자 공부만 하다가 성격 배린 건 아닐까 심히 걱정된다.


오빠만큼 똑똑한 사람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 같아서 응원했던 유학이긴 하지만, 이렇게 연락도 안 되고 단 한 번을 오질 않으니 조금 서운해. 선생님도 그건 조금 속상해하셔. 머리 좋은 건 알겠는데 심장은 어디 버려두고 다니는 거니. 우리가 보고 싶을 만도 한데. 적어도 나한테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


크리스마스에 한 번쯤은 올 줄 알았단 말이야. 나 ‘Happy Chrismas’ 크게 적힌 카드 아직도 갖고 있어. 내 산타는 촌뜨기 산타냐며 t는 어디 갔는지 애들이 놀리던 그 카드. 오빠 이젠 크리스마스 철자 안 틀릴 거 아냐. 나도 이젠 안 틀려. 보면 틀린 거 바로 알아. 몰랐겠지만 외국인들이랑 같이 일도 해. 저번 크리스마스엔 메일 끄트머리에 ‘Merry X-mas!’라고 인사말도 적었었어. 어렸을 땐 철자가 헷갈려서 X-mas라고 썼던 건데, 이젠 정말 알아. 그때 밴 습관 때문에 아직도 그렇게 많이 쓰는 거일 뿐이야. 정말이지, 쓸데없는 묵음은 왜 들어가서 사람들을 이렇게 헷갈리게 하나 몰라. 그치, 내 촌뜨기 산타야.


근데 오빠도 묵음 같아. 분명히 있는데 아무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사람. 저 멀리 있을 뿐인데, 마치 이름을 내뱉기라도 하면 큰 실수라도 되는 것처럼 부러 언급하기를 꺼리는 사람. 죽은 사람도 아닌데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정말 죽은 거면 오히려 계속 얘기하고 발음해서 기억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승에서 이름 불러주지 않는 사람은 저승에 가지도 못하고 구천을 떠돈다잖아. 그러니까 내가 어느 날 훌쩍 가더라도 오빠가 내 이름 자주 불러줘야 해. 사람들은 오빠 이름도 내 이름도 입 밖으로 내지도 않을 거 아니야. 아닌가. 외려 안줏거리가 되려나. 이제서야 하는 말인데, 그날 걔는 어떻게 혼자 살았을까, 이러면서.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가지고 놀기 딱이지, 이러쿵저러쿵. 뭐가 됐든 웃겨.


여기는 처서 지나기 무섭게 밤공기가 시원해졌어. 해도 짧아지고 있어서 벌써 다음 여름을 기다려야 할 판이야. 오빠도 여름 좋아했는데, 이젠 아니려나. 여기 날씨는 이제 우리가 알던 사계절이 아니라 오면 좀 놀랄 거야. 한번 와 봐. 바다 보면서 맥주도 한 캔 까고 그러자. 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 온다고 하면 날 맞춰서 내가 잘하는 음식도 좀 해놓을게. 오빠 좋아하는 건 또 내가 잘 아니까. 이것도 바뀌었으려나. 근데 오빠가 매일 해주던 계란찜 맛은 못 내겠어. 그건 나중에 레시피 좀 알려줘.

 

 

[크기변환]선생님댁.jpg

 

 

저번엔 선생님께 된장찌개를 해드렸는데 생각보다 맛이 좋다면서 웃으셨어. 이제는 전처럼 빠르게 걷지는 못하시는데, 그래도 낯빛은 여전히 좋으시고 웃음도 많으시니까 혹여 걱정하고 있었다면 좀 덜어도 돼. 아, 나도 연락만 자주 드리는 편이지 찾아뵙지는 않아. 아직 이사를 안 하셨거든. 선생님 댁은 항상 오빠랑 갔었잖아. 그래서 여태까지 딱 한 번 갔어.


선생님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샌 걸 보니 세월 흐른 게 와닿아서 착잡했는데, 갑자기 내 눈빛이 예전이랑 아주 같다고 말씀하셔서 엄청 놀랐어. 그대로일 리가 없잖아. 원하던 사람이 된 것 같아 대견하다며 칭찬해 주셨는데 나는 잘 모르겠더라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었는지도,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건지도 모르겠어서 그냥 여쭤봤어. 그런데 그냥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었다는 거야. 웃긴데 안 웃기더라. 원체 비뚤어진 걸 진작에 알았었나 봐.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게 꿈이었다니. 수식이 너무 소박해서 웃긴데 그 쉬워 보이는 걸 아직도 이루지 못했다는 게 안 웃겼어. 나는 여전히 게으르고 모났거든. 버스 요금도 무료인 줄로 알고 냉큼 자리에 앉은 할아버지 한 분이 현금이 없다며 곤란해할 때 요금을 대신 내드릴지 한참을 고민하다 선수 빼앗기는 게 나라는 사람이야. 그런데 무슨 괜찮은 사람이니.


오빠는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 되어있을지 궁금하다. 저번에 읽고 있다던 책 나도 읽어봤는데 꽤 재밌더라. 비행기 날짜랑 시간, 못 먹는 음식, 내가 좋아할 것 같은 책 3권. 이렇게 알려주면 되겠다. 이 글 혹여 본다면 메신저든 메일이든 편지든 알려줘. 바깥에서 ‘오빠’라는 단어를 뱉기만 해도 나는 우리 촌뜨기 산타 생각이 절로 나는데 오빠는 그 무엇에도 내가 떠오르지 않는 건지 조금 서운하다. 어쩜 이렇게 무관하게 굴 수 있는지 궁금하지만 더 궁시렁대지는 않을게. 위에 말한 것들 알려주면 서운한 게 좀 사라질 것 같아. 정말 짧게 쓰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진 것 같네. 우선은 웃으면서 지내고 있어.

 

매미 울음소리 우렁찬 밤에, 오빠에게.

 

 

 

컬쳐리스트 태그.jpg

 

 

[이주연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9.1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