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사상과 영혼의 얽매임(3)

글 입력 2024.08.3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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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 by Yang EJ (양이제)]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요?

  

이번에는 미국작가 카슨 매컬러스의 소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을 살펴보겠습니다. 1930년대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각자 나름의 이유로 외로운 인물들이 나옵니다. 음악레슨을 받기 어려운 가난한 집안에서 작곡가를 꿈꾸는 소녀 '믹', 자본의 불균형을 비난하며 마을 주민들을 계몽하고자 하는 주정뱅이 '제이크 블라운트', 흑인 인권을 위해 함께 싸워줄 동지를 찾는 의사 '코펠랜드' 그리고 자신의 말(수화)를 유일하게 이해해 줄 친구 안토나포울로스를 매일 그리워하는 청각장애인 '존 싱어'. 이들 모두는 쓸쓸하고 고독합니다. 소설은 마지막 인물인 존 싱어가 읍내로 이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싱어는 원래 읍내로 이사 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친구 안토나포울로스와 함께하는 단조로운 생활이 좋았습니다. 친구와 매일 똑같은 출근길을 걷고, 각자의 직장으로 흩어지기 전 매일 똑같은 방식으로 인사를 나누고, 저녁 식사와 체스 게임으로 함께 마무리하는 변함없는 퇴근 후 풍경이 만족스러웠고, 행복했습니다. 싱어는 한낮에는 묵묵히 세공일을 하고, 저녁에는 퇴근한 친구에게 낮 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쏟아냅니다. 마침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저녁이 되면 싱어는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였고, 자신과 같은 청각장애인인 친구 안토나포울로스는 이에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싱어의 이러한 일상은 길게 가지 못합니다. 어느 날, 안토나포울로스가 정신병동으로 이송되면서 말이지요. 싱어는 그가 떠난 후 절망적인 몇 개월을 보내다 결국, 친구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새 거처는 음악을 사랑하는 소녀 믹과 그의 가족이 살고 있는 읍내의 3층짜리 한 하숙집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싱어는 믹을 포함한 블라운트, 코펠랜드 세 명의 외로운 이웃들과 만나게 됩니다. 이 세 명은 추후 싱어의 방을 드나들며 그의 주요 방문객으로 자리 잡습니다.

   

이 세 명의 방문객은 모두 말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 인물들입니다. 믹은 음악과 자신의 장대한 미래 계획에 관해 얘기하고 싶어 합니다. 블라운트는 빈익빈 부익부를 초래하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설파하고 싶어 합니다. 코펠랜드는 미국 사회로부터 동족이 겪는 부당함과 그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공유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이를 스스럼없이 나눌 만한 말동무가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말을 하고 있지만, 말을 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세상은 따분하며 서글프고 때론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던 차에 셋은 듣지도 말할 수도 없는 청각장애인 존 싱어를 만납니다.

  

정확하게는 싱어는 사람의 입 모양을 읽을 수 있도록 독순술을 훈련받은 청각장애인이지만, 이 셋에게 그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입 모양을 모두 읽어내든 혹은 분위기로 대화를 추측하든 그들은 싱어의 '말'할 수 없는 점에 매료됩니다. 싱어와 방문객과의 대화는 종종 이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싱어의 방을 찾은 이웃들은 저마다 하고팠던 말들을 폭발하듯 싱어에게 쏟아냅니다. 싱어는 그들의 입술을 읽으며 한 박자 늦게 그들의 말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싱어는 대화하는 동안 대부분 따스하게 미소 짓고 이따금 고개를 끄덕여줍니다. 때로는 적절하게 종이에 말을 써서 건네줍니다만, 싱어가 직접 의견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방문객들에게 필요한 건 싱어의 말이 아니죠. 그가 가끔 보여주는 아주 작은 반응, 그거 하나면 됩니다. 그들은 싱어의 사소한 행동을 단서 삼아 위안과 평안을 얻습니다. '아. 이 사람만은 내 말을 정말로 이해해 주고 있어.'하고 말이죠. 사람들은 싱어가 ‘말’을 하지 못하는 동안 그를 향한 환상으로 머릿속을 채웁니다. 그들은 만족스럽게 방을 나섭니다.

   

그러나 싱어의 처지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주기적으로 정신병동을 찾아 자신의 단짝 안토나포울로스와 짧은 면회 시간을 갖습니다. 친구 앞에서 싱어는 손님들의 말을 조용히 들어주던 읍내에서의 모습과 사뭇 다릅니다. 그는 늘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니는 손을 꺼내 한참을 친구에게 말을 쏟아냅니다. 어찌나 열심히 손을 움직이는지 싱어의 이마에서는 땀이 맺힙니다. 면회 시간이 다 끝나가도록 그는 묵혀왔던 이야기를 친구 안토나포울로스에게 쏟아붓고, 친구의 미소를 보며 마음의 평안과 만족감을 얻습니다. 실제로 안토나포울로스가 수화로 말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친구가 수화를 어디까지 아는지 확신할 순 없으나 싱어는 친구의 부드러운 미소를 신뢰합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 이해해 주는 현명한 현자의 미소가 그에게 있다고 느낍니다. 면회 시간이 끝나면 싱어는 아쉬운 마음으로 걸음을 떼고, 친구를 다시 만날 훗날을 고대하며 읍내로 돌아갑니다.

   

소설은 결국 400여 쪽 동안 각 인물이 서로에게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한 채 끝이 납니다. 네 명의 주요 인물들은 각기 다른 운명을 맞이하며 계속 읍내에서 살아가거나 떠나갑니다. 저는 네 명의 인물 중에 소녀 '믹'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하숙집 운영과 식사 준비에 바쁜 집안 복도에서 베토벤의 교향곡을 떠올리는 믹은 앞선 글의 프란체스카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죠. 믹의 집안은 급작스런 사건으로 형편이 더욱 어려워집니다. 결국 믹의 가족은 하숙집으로 운영하는 집 건물을 내놓습니다. 믹의 언니는 아픕니다. 집에는 각종 청구서가 계속해서 날아옵니다. 믹은 집에 보탬이 되고자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시작합니다. 작중에서 믹은 이러한 심경을 느낍니다. '싱어 씨와 음악이 가득했던 내면의 방을 열기가 힘들어진다'라고요.

  

믹의 내면의 방은 항상 통통 튀는 발상과 음악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언니들과 함께 쓰는 안방과 하숙생들이 늘 북적이는 복도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믹의 도피처였습니다. 믹은 일과를 마치면 그 방에 들어가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교향곡의 멜로디를 되새기며 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믹이 악보도 없이 노래를 완벽하게 외울 수 있던 것도 그 방 몫이 컸습니다. 그러나 믹이 상점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딱딱하고 불편한 구두를 신고, 귀걸이를 늘어뜨릴수록 방의 존재감은 점점 작아졌습니다. 일과를 마친 믹은 더 이상 내면의 방으로 향하지 않습니다. 믹은 읍내의 카페로 향합니다. 믹은 이제 마을 주민 비프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과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지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내면의 방은 점점 더 열기 어려워지지만, 언젠가는, 그 언젠가는 그토록 원하던 음악을 할 수 있다고. 믹은 맥주의 취기와 미래를 향한 낙관이 혈관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소설 속 카페 주인 비프는 믹이 어느덧 제법 '숙녀다워졌다'고 묘사합니다. 남자아이처럼 짧은 반바지를 입던 키가 큰 소녀 믹의 모습은 이제 흐릿해졌습니다. 비프는 믹을 사랑했지만, 교향곡을 기억하지 못하는 믹을 보며 자신의 사랑이 사그라진 것을 깨닫습니다. 그에게 이제 믹은 맥주와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함께 찾는 조금 특이한 식사 취향을 가진 한 명의 손님입니다.

 

반면에,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프란체스카의 딸 캐롤라인은 로버트가 찍어준 프란체스카의 사진에 놀라워하며 이런 말을 합니다. "엄마의 이런 모습 본 적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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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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