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자연스러운 사랑, 부자연스러운 이해 - 이방인

글 입력 2024.08.3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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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만에 다시 소극장 산울림 무대로 복귀한 연극 <이방인>은 보도자료에서 강조되었듯이 원작의 색과 예술성을 최대한 존중하고 보존하는 방향으로 재해석되었다. 원작의 플롯을 충실히 따랐고 핵심적인 인물들의 등장 순서 및 사건의 배치는 물론, 그들의 대사까지도 압축적인 방식 속에서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다. 소설 <이방인>의 문학사적 위치와 영향, 소설이 카뮈에게 가져다준 명성 등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연극으로의 재현이 갖는 긍정적인 면도 분명 존재하지만 한편으로는 비단 <이방인> 뿐 아니라 모든 카뮈의 작품들이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여러 형태로 발표되는 양상에 있어서 연극이 그와 같은 모습을 어느 정도 답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의 여지도 관객들에게 남겼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고전의 가치가 불멸하는 것은 그것을 몇 번을 감상하더라도 매번 독자들로 하여금 새롭게 사유하게끔 하며 동시에 새로운 감정을 자극하여 저마다의 상상을 추동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번 연극 <이방인> 역시 내게는 또다른 사유의 기회를 제공했고, 그것을 '사랑'과 '이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세계문학사에서 손꼽히는 도스토옙스키의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더불어 <세상의 모든 아침>, <은밀한 생>, <떠도는 그림자들>등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파스칼 키냐르의 <음악 혐오>, 위 두 작품을 통해 연극 <이방인>에 대한 인식을 두 갈래로 나누어 제시하는 것이 소설의 주제 의식과 행간을 수용하는 나름의 흥미로운 지점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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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여기에는 이성이나 논리 같은 것은 없어. 다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젊고 싱싱한 힘에 대한 사랑이 있을 뿐이야. 알겠니, 알료샤? 내 이 어리석은 넋두리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니?"

 

이반이 갑자기 웃어댔다. (...)

 

알료샤가 외쳤다.

 

"지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생의 의미보다 삶 그 자체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지?"

 

"물론입니다. 형님 이야기처럼 논리에 앞서 우선 사랑을 해야 하는 거예요. 반드시 논리보다 앞서야만 해요. 그때 비로소 삶의 의미도 알게 되는 거죠. 이건 오래전부터 내 머릿속에 있던 거예요. 형님은 벌써부터 인생의 반을 성취한 셈입니다. 형님은 삶을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이제 그 나머지 반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형님은 구원받게 될 거예요."

 

 

이반이라는 인물을 뫼르소와 동일시하기에는, 혹은 세상의 부조리를 온몸으로 인식하고 저항하는 인물의 전형 내지 축도로 바라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이반은 뫼르소를, 뫼르소는 이반을 언제나 연상시킨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가 이성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 위에서 뫼르소라는 인물에 대해 대단히 감정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것은 사랑이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보였던 무관심한 태도가 끝내 어머니의 인생을 자신의 그것과 동일시하며 그녀의 판단과 우주를 이해하고자 했던 모습에 이르기까지. 마리에 대해 느꼈던 감정과 마리가 자신에게 결혼 얘기를 꺼내며 고백했던 감정에 대해 '아무래도 좋다'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던 뫼르소가 감옥에 수감된 이후 그녀와의 사랑을 되짚어보며 감정을 확신하고,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하게 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정말이지 끊임없이 반복되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이해'다. 특히 뫼르소가 '이해'를 언급하는 순간은 연극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등장하지만 주변 인물들은 뫼르소에게 지속적으로 '이해'라는 단어를 던진다. 그것이 그 상황에 어울리는 적확한 어휘였는가의 문제와는 무관하게 뫼르소에게는 '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이 지나칠 정도로 과도하게 쏟아진다. 사실상 그것은 그를 짓누른다.

 

그리고 뫼르소는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사랑보다는 인생의 의미가 중요하다. 뫼르소가 자신의 어머니를 어떠한 방식으로, 어떤 깊이로 사랑해왔는가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며 그들은 뫼르소에게 사형이 언도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그가 보여준 행동의 의미를 재단한다. 뫼르소는 그들은 이해해야 할 이유도, 이해할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뫼르소라는 한 사람의 인생의 의미를 해친다고 봐야 마땅할 것이다.

 

작중에서 뫼르소가 유일하게 평정심을 잃고 미친 듯이 분노하며 절규하는 순간은 바로 '신부와의 대화'이다. 뫼르소는 신부에게 둘 중 누가 더욱 삶에 솔직하며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를 힐난한다. 이것은 카뮈가 '종교는 철학적 자살'이라고 규정했던 맥락과도 맞닿아 있지만 그와 동시에 기독교 정신의 핵이라고 하는 사랑을 신부가 우회적으로 관념화하고 있음에 대한 비판이기도 할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신부가 뫼르소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었더라면. 만일 사형을 앞둔 그의 앞에 서있던 사람이 알료샤였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혹은 이반이었다면?


 

"난 아무것도 알지 못해."

 

헛소리라도 하는 것처럼 이반이 말을 이었다.

 

"난 아무것도 이해하고 싶지 않아. 나는 사실에만 충실할 작정이야. 벌써 오래전부터 모든 것을 이해하지 않기로 결심했어.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하면 꼭 사실을 왜곡하게 되거든. 그래서 나는 사실에만 충실하기로 결심한 거야."

 

 

어느 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한 세계를 사랑하기 위해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가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며 이해라는 어휘를 강박적으로 사용하지 않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하나하나를 보란 듯이 따져가며 그러한 과정이 없으면 사랑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며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한 인생의 공백일 것이다. 사랑은 이해라는 그릇에 담겨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숙고 끝에 마침내 준비된 이해로 사랑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다.

 

아랍인 살해가 아니라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보였던 행실이 법정의 화두가 되고 선고의 이유가 되기까지 그들은 한순간이라도 뫼르소를 사랑했을까? 그들의 세계를 사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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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혐오


 

 

우리 모두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음악은 공포에 질린 미소와도 같다. 심장의 박동, 호흡의 리듬과 유사한 모든 진동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긴장 상태로 우리를 이끈다. 무의지적이며 항거할 수 없는 공황 상태로 말이다. (...)

 

어찌 죽음을 얕잡아볼 수 있는가? 죽음을 비난할 셈으로? 나는 아케론을 믿지 않는다. 나는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죽음의 부당함에 대한 선언인가? 죽음이 불법이라도 되나? 어떻게 지배나 질병을 나무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성별을 나누는 것은 어떠한가? 어찌하면 '공포'를 부정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이미 존재하는 것에 책임을 돌릴 수 있는가?

 

현대의 기복 신앙은 구역질이 난다.

 

공포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한 사람들. 나는 최대한 웃음을 참아 보려 입술이 떨리거나 입꼬리가 꿈틀대지 않도록 피가 날 때까지 나를 꼬집는다.

 

 

위의 말을 뫼르소가 신부에게 분노에 찬 상태로 쏟아냈다고 상상하면 꽤나 흥미롭다. 우리는 모두 무의지적이며 항거할 수 없는 공황 상태에 던져져 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말이나 '우리는 그저 무의미한 세상에 내던져져 있다'는 카뮈의 말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처럼 뫼르소나 신부나 공황 상태에 처해있는 인간일 뿐인데 신부(혹은 판사)는 그에게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림자를 거짓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뫼르소는 신부가 믿는 신앙과 내세가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의 지금의 내게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구원받을 것을 종용하는 신부와 결단코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뫼르소, 둘 중 누가 죽음을 얕잡아보고 있는 사람인가? 누가 죽음을 비난하고 있는가? 누가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가?

 

뫼르소의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절규는 '최대한 웃음을 참아 보려 피가 날 때까지 자신을 꼬집는' 행위로부터 발생했을지 모른다.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의 로캉탱이 느꼈던 구역질과 뫼르소가 느꼈던 구역질은 그렇게 찾아온다.

 

키냐르의 말에 따르면 음악이라는 베일과 소리의 안식처로부터 벗어나, 혹은 음향적 안온함으로부터 벗어나 육체적 고통의 나신으로 되돌아가는 인생의 마지막에, 뫼르소가 군중들이 자신에게 증오의 함성을 퍼부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종교의 안온함보다는 공포를, 공포보다는 반항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가 마지막까지 원했던 것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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