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름 모를 이에게 남긴 편지

글 입력 2024.08.3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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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쓰는 행위는 늘 설렌다. 그동안 꾹 눌러 담았던 이야기를 맘껏 토로할 수 있다는 생각에 손가락이 분주해진다. 오늘 날씨가 더워 축 늘어졌다는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고마웠던 이야기 그리고 몇 년 전 추억까지 꺼내 글을 완성한다. 어쩌면 한 편의 드라마 같을지도 모른다. 처음 만난 날을 회상하며 친해졌던 계기 그리고 우리의 우정 또는 사랑이 긴 시간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담는다. 나는 늘 편지 마지막 인사로 기약 없는 약속을 한다. 건넨 편지가 상대에게 영원히 남아졌으면 하는 기대를 한다.

 

어느 날 친구 J가 나에게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편지로 펜팔 할 수 있는 곳이 있는데 재밌겠다며 같이 가자고 말했다. 뜨거운 캐모마일 티를 한 모금 마시던 나는 혀 천장이 데일 정도로 놀랬다. 아직도 이런 곳이 있냐며, 학창 시절 때 했던 교환 일기가 떠올라 웃음을 지었다. J는 펜팔을 통한 운명적인 만남이 로맨틱하다는 농담을 던진다. 허심탄회한 장난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지나간 사랑으로 힘들어하는 나를 위한 위로였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평소 편지 쓰는 걸 좋아하며, 디지털로 난무한 세상에 아날로그적인 소통이 신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솔직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면식도 없는 이에게 나의 고민을 편하게 털어놓을 유일한 기회가 아닐지 생각했다.

 

펜을 쥐자마자, 쉴 틈 없이 글을 써 내려갔다. 책을 읽고 좋았던 구절을 언급하기도 했으며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숨김없이 다 공개했다. 그동안 좋았던 것을 이름 모를 이에게 다 전해주고 싶었다. 물론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나의 세계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신이 났다. 편지에는 가볍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겁지 않은 고민을 작성했다. 올해 이런 일을 겪어서 힘들었는데, 읽는 분께서는 어떻게 이겨냈을지 조언을 구하는 질문을 건넸다. 그리고 올해는 현재에 충실한 사랑으로 마무리하고 싶다는 굳은 다짐으로 마무리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성하다 보니 편지 2장이 채워져 있었다. 얼마나 꾹꾹 눌러서 썼는지 볼펜 심이 점점 희미해졌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나에게 2장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름 모를 타인을 앉혀두고 밤새도록 대화하고 싶을 정도였으니 부족했다. 평소 말이 많지 않은 편인데, 이상하게 편지만 쓰면 모든 걸 다 이야기하고 싶은 모습이 아이러니하다.

 

서재에서 타인이 쓴 편지를 꺼낼 수 있다.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 본인이 선정한 키워드를 보고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 참고로 나는 정반대의 사람을 택했다. 현실적인 성향을 지녔으며 하루에 커피 한 잔을 꼭 마셔야 하는 현대 워커홀릭으로 살아가는 분의 편지를 골랐다. 낭만적인 삶을 꿈꾸며 커피보다는 따뜻한 차 한 잔으로 하루를 보내는 나와 대조되었다.


정반대가 끌리는 법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차분한 성격을 지닌 친구 J는 발랄한 사람의 편지를 골랐고, 이상을 꿈꾸며 살아가는 나는 현실적인 사람의 편지를 택했다.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모른 채, 기대하며 한 글자씩 읽었다. 내가 선택한 편지의 인물은 꽤 힘들어 보였다. 내용이 길진 않지만, 진한 볼펜 색을 보니 고민하며 적은 티가 났다. 남들이 보기에는 큰 성취를 이룬 사람처럼 보이지만, 쉴 틈 없이 달려와 힘들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자세한 그의 고민은 차마 꺼내기 어렵지만, 번아웃이 온 듯하다. 어떤 조언을 건넬지 조심스러웠다. 20대인 나는 남들보다 늦은 시작을 했고,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하지만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얻은 해결책을 이름 모를 이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에서 답장을 썼다. 몇 정거장을 지나쳤는지 모를 정도로 메일 작성하는데 몰입했다.


모두가 각자 다른 삶을 지향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고민의 크기와 본질은 같다고 느낀다. 어느 인생에 속하든, 모든 이들은 힘듦을 숨기며 살고 있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상황이 비일비재 하니,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에게 토로하는 이 시간이 소중했을지 모른다. 나 또한 그랬으니 말이다. 글을 통해 내 고민을 적으며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은 서로가 서로를 치유하는 과정이다.

 

 

[이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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