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비밀의 역사학 - 누구나 아는 비밀 [영화]

글 입력 2024.08.3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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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아는 비밀

Everybody knows, 2019


감독 : 아쉬가르 파라디

 

배우 : 페넬로페 크루즈, 하비에르 바르뎀

 

 

영화 <누구나 아는 비밀>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고향을 찾은 라우라.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모여 떠들썩한 결혼식 파티를 즐기던 중 사랑하는 딸 ‘이레네’가 사라진다. 거액의 몸값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받은 라우라와 그녀의 가족들, 오랜 친구이자 과거 연인 사이였던 파코까지 나서 딸을 찾기 위해 애쓴다. 한편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 사이에는 서로를 향한 의심이 피어오르고, 지금껏 숨겨온 과거의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그녀는 남편을 불러 세웠다. 무슨 또 실없는 소리를 하려고. 그녀를 돌아보는데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앉아 봐, 할 이야기가 있어.' 담담해 보이는 목소리 뒤에서 파도가 들린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 오늘 같이 좋은 날에?

 

남자는 그녀의 곁에 앉는다. 그들 주변으로 사람들이 오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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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틈이 거대한 균열로


 

<세일즈 맨> 이후, 2년 만에 내놓은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신작이다. 아카데미와 영화제에서 사랑받는 감독이다 보니 무조건 어렵고 지루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재밌다. ‘실종’이라는 미스터리한 소재를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물 사이의 관계도 팽팽해서 이다음은 어떻게 될지를 상상해 보는 맛이 있다. 페넬로페 크루즈나 하비에르 바르뎀 같은 유명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도 즐겁다.

 

가장 행복해야 할 동생의 결혼식 날이 사랑하는 딸의 실종으로 최악의 날이 되어버렸다. 첫 번째 용의자는 베아가 일하는 학교에서 결혼식 영상 촬영을 위해 데려온 전과자 출신의 아이들이다. 라우라의 가족들은 그녀에게 그런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초대한 것이냐며 몰아세웠다. 하물며 그 아이들에게 와인에 대해 가르치다가 ‘선생님이 가셨으니 몰래 한잔할 사람?’이라며 넉살 좋게 웃던 파코마저도 그녀의 경솔함을 나무라 했다. 두 번째 용의자는 파코의 농장 인부들이다. 자신의 농장을 위해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일했던 농장의 일꾼들이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파코는 그들의 숙소에 서슴없이 들어가 방을 뒤졌다. 마지막 용의자는 바로 라우라의 남편이었다. 어쩌면 돈이 필요해서 자작극을 벌인 게 아닐까 하는.

 

그뿐만이 아니다. 가족의 구성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이레네를 찾는데 온 힘을 쏟는 파코를 향해 그녀의 가족들은 그가 과거에 라우라에게 사기를 쳐 지금의 농장을 헐값에 사들였다고 비난했다. 라우라의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을 찾아가 너희는 내게 모두 빚이 있다며 오래전 내기 도박으로 잃었던 자신의 재산을 돌려줄 것을 종용했다. 마치 어제의 축제는 모두 잊어버린 듯 그들에게 남은 건 서로를 향한 원망과 의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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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아는 비밀


 

비밀이란 무엇인가. 비밀은 자고로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비밀’은 비밀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영화의 제목은 역설적이다.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도 알지 말아야 할 비밀은 그것이 모두가 아는 비밀이 되었을 때 가장 강력한 파장을 낳는다. 다시 말해 비밀은 태생부터가 역설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더불어 이 영화의 중요한 순간도 바로 거기에 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누구나 아는 비밀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영화 속에서는 총 5개의 비밀이 등장한다. 하나는 ‘과거 라우라와 파코가 연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아무도 오르지 않는 종탑에 서로의 이니셜을 새겨 넣으며 비밀스러운 연애를 했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그들의 역사는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 있었다.

 

두 번째는 ‘이리나의 납치’다. 만약 경찰에 신고하면 이레네를 죽이겠다는 범인들의 협박에 그녀의 가족들은 경찰은 물론, 이웃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납치 소식은 소문과 의혹의 형태로 마을을 부유했다.

 

세 번째는 ‘라우라의 집이 파산을 했다는 것’이다. 300만 유로를 준비하라는 범인들의 요구에 라우라는 가족들에게 자신은 그럴 능력이 없으며, 함께 오지 않은 남편은 사업 실패 후 벌써 2년째 집에서 놀고 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 사실은 범인들의 귀에도 들어갔는지 몸값을 요구하는 문자는 파코의 아내인 베아에게 도착했다.

 

네 번째 비밀은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스포일러다. ‘이레네가 실은 파코의 딸’이라는 것이다. 파코는 그 사실을 왜 당신이 이레네의 몸값을 지불하려고 하냐는 아내에게 털어놓았다. 덕분에 그 비밀은 이제 모두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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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가진 자, 비밀은 들은 자.


 

비밀이 태어나면 세상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비밀을 아는 사람들과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 흥미로운 건 영화 속에서 비밀을 품은 사람은 하나같이 여성이고, 비밀을 듣는 사람은 남성으로 특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라우라는 자신의 남편에게 파코의 아이(이레네)를 가졌음을 고백했다. 죄책감을 느낀 라우라는 아이를 지우려고 하지만, 오히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설득해 함께 키우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이레네가 납치된 후, 라우라는 이번엔 파코에게 이레네가 그의 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 말에 파코는 자신의 농장을 팔아 돈을 마련해 그녀를 구하려 했다. 다시 말해 이레네는 그 자체로 비밀인 셈이다. 그리고 그녀의 생과 사에는 그녀의 아버지들이 언제나 관여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비밀(이레네)을 잉태했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지 못할 위기에 처했을 때, 혹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그녀를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말하자면 그녀는 두 번 태어난 셈이다. 한번은 알레한드로에 의해, 한번은 파코에 의해.

 

그러니까 영화 속에서 벌어진 이레네의 납치 사건은 사실상 그녀의 출생에 관한 메타포다. 영화의 말미, 파코는 지친 몸을 뉘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이제 갓 태어난 자신의 딸을 마주한, 안도 어린 그 미묘한 감정과 같은 종류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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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비밀


 

앞서 나는 영화 속에서 5개의 비밀이 등장한다고 했다. 나는 그 중에서 4개만 말했다. 이제 마지막 비밀을 밝힐 차례다. 마지막 비밀은 ‘이레네를 납치한 범인은 라우라의 사촌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돈 때문에 자신의 남편과 공모하여 이레네를 납치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그녀의 어머니가 눈치챘다.

 

라우라 가족이 아르헨티나로 떠난 후,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아버지를 조용히 불렀다. 또 다시 비밀이 잉태되었다. 누군가의 어머니는 그 비밀을 누군가의 아버지에게로 전달한다. 비밀을 알게 된 아버지는 이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리고 그 선택은 어떤 아이를 살리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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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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