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늘날 우리가 선언해야 할 것은 [도서/문학]

글 입력 2024.08.31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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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어느 곳을 가도 우리는 인공지능(AI) 시대, 디지털 혁신, 미래 교육의 패러다임 등에 관한 사람들의 얘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이는 사회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지속적으로 부상해왔고 이미 예정된 다음 세대의 사회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증가하고 있음을 동시에 보여준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의 미래를 예측하는 일에 불현듯 <공산당선언>에 담긴 마르크스의 정신을 개입시키는 행위는 엉뚱한 것을 넘어 하나의 과오인 양 여기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 사회와 학문과 인간이 진보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가치의 재발견이 존재한다. 가치가 지니는 시대적 의미와 방향성이 달라졌기 때문에 마르크스라는 이름이 죽지 않고 회자되는 것이며 이 글의 의의 또한 바로 이 지점에 자리하고 있음을 밝힌다.

 

다시 말해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AI 시대라는 미명 아래 다시금 주목받게 될 사회변동의 예측과 그 가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고전적 성격의 <공산당선언>이다. 고전이란 결국 이러한 역할을 수용하고 이에 충실함으로써만 명맥을 잇기 때문이다.

 

<공산당선언>은 마르크스가 엥겔스와 공동명의로 저술한 이론서이자 행동 강령이며 이데올로기적 혁명서이다. 책의 서문에서도 나타나듯이 <공산당선언>은 철학적, 정치적 성격에 국한되어 있는데,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경제라는 하부구조에 의해 정치, 종교, 문화라는 상부구조가 결정된다. 따라서 책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전제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또 다른 저서인 <자본론>, <경제학 비판> 등의 필요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공산주의 사상의 시발점인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 역시 가치의 자립화와 잉여가치론과 같은 경제론적 학설로부터 기인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경제 원리를 자신의 사상적 토대로 삼아 자본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규명하므로 <공산당선언> 역시 유물론적 역사관에 기초하여 경제구조 변화의 필요성을 주창하는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한다.

 

예컨대 책의 목차 중 제 2장 '공산주의의 원칙'에서 혁명의 발전 경로를 설명하며 언급하는 누진세, 상속세, 강제 공채, 국영 은행의 집중화를 비롯한 열두 가지의 조처들이 이러한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책을 내용이 아닌 형식의 측면에서 접근했을 때 <공산당선언>은 공산주의 탄생의 배경과 그와 관련한 원칙 및 이론에 대한 설명, 공산주의의 사상 체계, 각 유럽 국가별 서문들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 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다소 정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성의 이유는 여느 정치철학책들처럼 사상의 탄생 배경과 의의를 독자로 하여금 수월하게 이해시키기 위함인데, 이 책이 <공산당선언>이라는 주요 저서에 다른 저서와 서문을 덧붙인 것임을 감안하여도, <자본론>이라는 배경지식이 부재한 상태로 마르크스를 접하는 독자에게 특히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로 말미암아 야기된 공산주의의 해체는 마르크스 사후 거진 백 년 후에 일어났으므로 당연하게도 <공산당선언>의 순수 원본에는 공산주의의 붕괴와 그 이유는 기술되어 있지 않다. 더욱이 자본주의 체제가 자체적인 모순을 견디고 지속되어 사람들에게 불가항력이라는 이름으로 각인된 이유 또한 전혀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공산당선언>은 미완성인 책이라 말할 수 있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은 다시 한번 생명력을 획득함과 동시에 현시대의 방향성을 잉태하게 된다.  공산주의가 구시대적 유물 따위로 전락한 순간부터 소위 마르크스주의라고 하는 것은 책 내부가 아닌 외부를 사유하는 것을 지칭하며 따라서 책은 객체의 입장이 되어 외부로 내재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 사회에서 공산주의는 정녕 유토피아라는 허명 속에 갇혀있을 뿐인가? <공산당선언>의 독자는 어떠한 자격과 위치에서 사유를 책 안으로 끌고 와야 하는가? 자기모순에 의한 자본주의의 필연적 붕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만이 빗나갔을 뿐 그가 지적한 현실의 양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는 타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에 기반하며 무한경쟁에 따른 반문명성과 가족공동체 상실은 끊임없이 문제로 제기된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대립은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의 일환이며 노동자들은 시대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 그 자체로 남아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가를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스스로 반성하고 자신의 위치를 자각해야만 한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마르크스가 '성숙한 개인'을 사회 변화의 필수 전제로 상정했듯이, 책에서 역설하는 인간 해방의 가능성을 탐구하며 <공산당선언>의 가치를 재발견하듯이 개인의 변화가 그토록 절실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AI와 실존주의라는 두 가지 열쇠를 손에 쥐고 변화의 길을 모색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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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년 전 코로나가 자연재가 아닌 인재로서 명명된 순간 그 자체로 반이성적이고 몰이성적인 성질을 가졌던 맥락의 동일선상에서 AI 역시 인간 고유의 이성에 반하는 방향으로의 발전 가능성과 더불어 여러 윤리적 문제점들을 암시한다. 마르크스가 계급 투쟁의 역사 과정에 있어서 반이성을 전제하였고 실존주의가 반이성주의를 내세우며 참된 실존의 회복을 지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인류 역시 AI라는 기술 중심 사회, 자본 중심 사회 속의 내재된 반인간적 성질로부터 새로운 미래 시대를 열어젖히게 되었다.

 

<문학/과학> 2023년 114호 특집 'AI는 생성하는가'에 따르면 말과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생성형 AI의 능력은 얼핏 인간의 노동을 보조하거나 강화하는 듯 보이지만 인간의 노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한다. 나아가 그러한 생성형 AI는 인간의 창의적 노동에 대한 이중적 착취를 가능하게 한다고 밝히고 있다.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격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마르크스는 결코 단순히 이성이라는 대안으로 반이성을 덮어버리지 않을 것임을 고려할 때, 결국 반이성적 대상을 전복시켜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착되는데 우리는 이미 18세기의 산업혁명이 그러했듯 인간이, 노동자가 착취로부터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았다.

 

우리가 더는 코로나라는 질병 자체와 싸우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던 것처럼, 또한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졌던 것처럼 결국 우리가 맞서야 할 것은 AI가 낳은 부조리 그 자체이다. 인재로부터 태어났기에 부조리이고 그에 대해 대처하는 주체 역시 인간이기에 사회의 병폐는 심화되었다. AI 기술의 멈추지 않는 발전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참혹한 양극화이며, 극심한 빈부격차는 이제 그 어떠한 이념보다도 교조적 진리로 사회 안에 자리하며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 계층은 어느 때보다 인간 소외를 여실히 겪고 있으며,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AI의 딥페이크 기술은 공공연한 사회 문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생각과 태도를 견지하고 행동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 우리는 앞서 언급했던 실존주의 길을 살펴보아야 한다. 마르크스는 인간 해방이라는 과업 아래 그러한 맥락의 길을 제시할 수는 있으나 그 길을 걷게 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만을 유일한 첩경으로 제시했기에 현시점에서도 길의 종착지가 어떠할지는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때 실존주의는 우리는 바로 반항의 길로 인도한다. 본질에 앞서는 실존 자체는 시대의 부조리에 가려지는 듯하나 오직 부조리에 대한 반항으로써 참된 실존을 회복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현실 자체를 냉철히 분석하고 탐구하며 이내 그 현실에 온몸으로 대항하여 비로소 현실 속의 원리에서 길을 모색했던 마르크스의 그것과 궤를 같이 한다.

 

114호 특집에 실린 이광석의 <404 시스템 에러 : 생성형 AI가 인도하는 '멋진 신세계'>는 동시대 인공지능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며 인간의 사유와 결정을 생성형 AI에 의탁함으로 말미암아 인공지능의 물신화 가능성을 지적하고, 생성형 AI를 자본주의적 욕망 기획으로 바라보고 이에 대한 민주주의적 해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고려할 때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만들어낸 그 무엇에 종속되어 있으며 여전히 그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어야만 하는, 마르크스가 제시한 오늘날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전형이다.

 

그러나 참된 반항은 반항으로서 끝나지 않으며 공산주의 역시 공산주의로서 끝나지 않았다. 전 세계가 열광적으로 떠들어대는 AI 시대는 어쩌면 현시대의 연장선일 수 있고 한편으로는 이름만 달리하는 이전 역사 발전의 한 단계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은 변화할 것이고 변화해야만 한다. 신이 내린 가혹한 형벌에도 좌절하지 않고 담담하게 산 정상으로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처럼, 죽음이라는 인간 조건 속에서 의연히 운명과 맞선 <페스트> 속의 인물들처럼 우리는 지금의 부조리에 반항할 뿐이다. <공산당선언>과 AI 시대는 앞으로도 미완성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 미완성 속에서 끊임없이 반항하고 고민하는 개인만이 나아가는 주체이고 꿈꾸는 주체이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새로운 주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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