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내 신경은 버드나무처럼 흔들거리고 해파리처럼 투명해요.

글 입력 2024.08.3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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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을 시작했다. 해외 자료를 조사하고 번역하고 문서를 정리하는 등, 대학원 조교가 할만한 일. 되게 별것 아닌 일들 같은데 간단해 보이는 지시들이 좀처럼 한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학부에서도 대학원에서도 조교를 한적이 없어서 그런지 일이 서툴고 어색하다. 각주도 그냥 이렇게 하면 된다는게 정확히 무슨 말일까요? ‘이렇게 한다는 것’이 의미할 수 있는 몇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나서 너무 바보 같아 보이지 않게 몇개의, 가장 개연성 높은 가능성에 대해서만 질문한다. ‘아하, 이렇게 하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럼 뒤에 ‘그래요’나 ‘맞아요’ 등이 나와줬으면 좋겠는데 ‘아니요’라는 말이 나오면 당혹스럽다. 한번 못 알아듣고 두 번 못 알아듣는 것까지는 괜찮다 쳐, 근데 세번도 괜찮나? 결국 반만 알아들은 채로 다시 내가 있던 곳으로 터벅터벅 돌아온다.

 

이후에도 이어지는 ‘혹시나 해서요’, ‘확인 차 여쭤봅니다...’ 이 말들은 ‘원래는 괜찮게 일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존재한 적 없는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방어적으로 말해진다. 다 아는데 그냥 혹시나 물어보는 거에요…오해 없길 바랍니다…그리고 면접 때 ‘저 꽤나 일을 잘합니다’라고 과장된 자신감을 갖고, 시원시원한 인격의 탈을 쓴 채로 한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말들이 사뭇 부끄럽다.

 

그 날은 퇴근하는 버스에서 아주 괴로울 정도로, 집요하게 부끄러웠다. ‘왜 말을 척척 알아듣지 못하지’ 같은 자책에서 시작해서 소위 말하는 ‘알잘딱깔센’이 되고 싶어하는 스스로의 모습에서도 수치심을 느꼈다. 자기 착취적이라고 생각했던 용어를 나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내가 이렇게 누군가를 기쁘게 하고 싶어하며 사소한 것에서 인정받고 싶어하다는 사실이나.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부끄러워서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한병철이 말하는 것처럼 허상의 성과나 인정을 위해서 스스로 고삐를 쥐고 나를 몰아붙이고 있네. 웃긴건 남의 인정을 원하지 않는다, 인정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다 등, 인정욕구를 회피하는 일 또한 부끄럽게 느껴진다.

 

생각이 끊기질 않아서 버스 손잡이를 잡고 휘청거리며 짐짓 괴로웠다. 갑자기 작은 것에 이토록 골몰하는게 병리적일 정도인데 이런게 신경쇠약인가 싶었다. 아직 보지도 않은 뻬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신경쇠약에 걸린 여자’라는 영화의 제목이 계속 떠올랐다. 알모도바르씨는 골 때리는 영화 하나를 만들어 놓았을테고. 신경쇠약은 그 존재 자체로 너무 설득력이 있는 단어다. 내 신경은 버드나무처럼 흔들거리고 해파리처럼 투명해요… 그리고 네이버에 ‘신경쇠약’을 좀 찾아보다 그 증상이 모두 나의 것과 같은 것만 같아 18번 버스에서 나는 흐물흐물하고 슬퍼졌다.

 

하는 수 없지. 유투브와 음악으로 스스로에게 잔인한 이 감정들을 지워버리자,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얼마나 해괴한 소리를 하고 있는지 보면 어차피 다 사라질 감정이다. 실제로 트럼프가 ‘난 카말라보다 잘 생겼어(I am better looking than Kamala)’라고 말한 것을 보자 깔깔깔, 슬퍼한 것이 민망하게 웃음이 났다. 어른들이 정치를 재밌어하는것도 이런건가 싶었다. 미시적이지만 빈틈없는 최선을 다해야만 작동하는 현실과 대비되는, 거시적인 세계에서 오히려 변칙들과 (anomaly) 해프닝들이 판을 치는 정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니까. 세상은 거대한 법칙이나 숫자가 아니라 조만한 것들이 하나의 물꼬가 되어 시간과 역사를 바꾸는군. 그렇다고 해서 엑셀과 정리정돈, 이성의 세계가 무너지는건 아니지만 말이다.

 

*


글을 쓰며 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 하는 미덕은 어떤 것일까 되묻는다.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내놓지 않으면 뭔가를 숨기는 거라는 생각? 하지만 나는 보통 ‘무언가를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인정없음은 될 수 있을지언정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닌데. 부끄러움을 이야기하며 나는 침묵, 그러니까 침묵의 미덕을 깨고 시간과 공간에 ‘나’라는 상황으로 균열을 일으키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적시 적소에 요구되는, 말하면 그대로 배경으로 묽어지는, 조화로운 말을 하는 것을 그치고.

 

얼마전 S 교수님은 ‘유예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독교는 예수의 재림을 유예하고 자유민주주의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도래를 유예하고 계속 스스로의 불완전을 되뇌일때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단이 명이 짧은 이유는 신을 유예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영원히 유예되는 것은 실체다. 글을 쓰는 것은 영원히 유예되는 실체를 언어로 포착하고, 포기하고, 넘어가고 뭐 그런 일이라고. 부끄러움 같은 내면의 감정에 대해 쓰는 것은, 외면만큼 내면이 희한한 것들이 많이 존재하는, 환경과 시스템이 있는 하나의 세계 그 자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입장티켓 없는 타인의 내면 말고 무료이자 진실함을 계속해서 시험까지 할 수 있는 스스로의 내면은 푹 빠져서 시간을 보내기 좋은 하나의 세계임에 틀림없다 (이 지점에서 나는 산책이 외면과 내면의 매우 의식적인 공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외면의 세상이 부유하고 내면이 오히려 달리는 유체이탈의 상태). 내면이 하나의 실체라 유예되는 것이라면, 내면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공드리 감독의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라쿠나(Lacuna)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일지도.

 

다시 하루로 돌아가, 이후 김뜻똘의 ‘Psychomania’를 들으며 락이라는 장르에 기대어 부끄러움과 ‘x까!’ 사이를 오갔다. 좀처럼 ‘합’으로 이르지 않는 ‘정반’의 사고다. 부끄러움은 몇몇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하니 물을 콸콸 부은 듯 옅어지고 희석된다. 아마 오늘은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심장이 너무 많이 뛰고 과민해져서 그런가봐. 이렇게 부끄러워했다는 사실이 부끄럽군. 그치만 나는 마음, 그다지 깊지 않은 곳에서 알고 있다. 나는 또 유약하고 흔들거리는 내 자그만 자아를 넘어 시원함과 자연스러움을 가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부작용으로 아마 또다시 부끄러울 것이다. 견딜 수 없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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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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