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부정당한 이가 행하는 마지막 적선 - 연극 '이방인'

글 입력 2024.08.31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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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방인'의 도발적 전개는 사람들의 다양한 감상을 이끌어낸다.

 

나도 시기별로 이 작품을 감상한 느낌이 다르다. 이전의 나에게는 '이방인'은 사상적 우화로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좀 더 뫼르소의 떠돌이 같은 삶에 대한 고찰로 받아들여진다.

 

카뮈가 이 소설을 발표했을 때 나와 비슷한 나이였다고 한다. 실제 정치에 깊게 관여한 그의 삶의 행적을 고려할 때 작가가 의도한 것은 후자보다는 전자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뫼르소의 고독과 몰이해에 대한 고통을 상상하면, 이 부조리한 삶에서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몸부림쳤던 카뮈도 자신을 어느 정도 투영하지 않을까 싶다.

 

나의 이런 감상은 뫼르소가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연기한 배우를 통해 묘사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연극에서 등장하는 뫼르소는 내가 소설에서 만났던 뫼르소보다 미세한 감정을 가진 인물이었다. 미세한 감정을 가졌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못하고 억압되었을 때 뫼르소는 더 크게 고통받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오늘 리뷰는 연극에서 만난 뫼르소를 중심으로 이야기해보자 한다.

 

나는 먼저 태양이 뫼르소를 살해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별빛이 그를 구원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연극 '이방인'을 두 세계로 나누어 해석하고 싶다. 하나는 '태양의 세계'다. 태양의 빛은 명확하게 사물을 비춘다. 특히 강한 빛은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는다. 이성과 합리를 다루는 아폴론의 주관하는 태양이 뜬 시간 동안, 명확함은 폭력적일 정도로 세계를 지배한다.

 

'이방인'에는 태양과 같은 사고관을 가진 사람들이 두루 등장한다. 미세한 깊게 보다는 문명의 체계를 수호하고자 하는 법, 그 법안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고자 하는 법관, 그리고 그만큼이나 명확한 선과 악의 기준을 맹신하는 신부가 그 예가 된다. 그들이 얼마나 고결한 동기가 있는가를 떠나, 그들은 빛을 들이대면서 어둠을 찾는다. 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누구도 인지할 수 없다면 합리성과 정의의 핑계로 존재를 부정하거나 그를 선도하려 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알제리의 태양은 폭력적으로 내리쬔다. 가만히 있어도, 약간 움직여도 온몸을 흠뻑 적신다. 여름의 뜨거운 공기를 마셔본 사람들은 열기가 얼마나 사람의 피부를 찢고 숨을 막는지 이해할 것이다. 뫼르소는 태양의 세계에서 쉽게 호흡하지 못한다. 왜냐면 그는 세계와 삶에 대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데 일종의 장애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연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어머니의 죽음에도 슬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불량한 이웃의 일탈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다 보면 줏대가 없는 것을 넘어서 자기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를 이해하지 못한 변호사는 뫼르소가 자신의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그런 상태에 빠졌는가 물어보지만, 뫼르소는 그 사실을 부정한다.

 

하지만 작품을 잘 들여다보면, 뫼르소의 미세한 감정들이 포착된다. 그는 홀로 잠이 들면서 어머니가 왜 애인을 사귀었는지 이해하며, 늙은 개를 잃어버리고 우는 노인을 보며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사형을 선고받고는 우연히 발견한 신문지를 통해 세상을 저주하는 격렬한 여자의 모습을 떠올릴 뿐만 아니라, 그를 찾아온 신부에게 분노를 날것으로 표출한다.

 

하지만 그의 이런 미세한 감정은 결코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가 결코 세계에서 이해될 수 없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두 부류의 증인을 교차하면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뫼르소가 유죄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합리적이고 납득이 될만한 설명을 한다. 그는 어머니가 죽은 후에 슬퍼하지 않았으며, 늙은 어머니를 찾아가지도 않았다.

 

반대로 그의 죄를 덜려는 이들의 주장은 맥락이 엉망이다. 늙은 노인, 그의 애인, 평판 안 좋은 남자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심스럽다. 뫼르소가 무엇을 해보기도 전에 끔찍한 다른 친족 살인사건과 엮인 탓에, 세상은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뫼르소는 철저한 이방인으로서 감옥에 눕는다. 감옥 속에서 그에게는 그 어떤 포옹도 허락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얄팍한 사고거리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우연히 발견한 신문거리에서 읽은 잔혹한 친족 살인 사건을 읽으면서, 자신을 그러한 죄를 저지르게 한 세계를 저주하는 여자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런 그에게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라'라는 말이 들릴 리 없었다. 세계는 한 번도 그를 품 안으로 두지 않았으며, 존재할 자격을 잃어버리게 하지 않았는가.

 

그를 구원한 것은, '무관심한 다정함'을 품은 별빛이었다. 별빛은 태양과 대조된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어스름하게 비추며, 주목하는 대신 흘러가게 둔다. 뫼르소는 그 별빛 밑에서 자신의 감정, 삶의 의미, 자신의 존재가 정의 당하거나 심판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내버려둠에 전율한다.

 

그 별빛은, 면회를 거부한 신부처럼 강제로 들어오지 않고 그가 갇혀있는 감옥에 은은히 흘러들어왔다. 그는 비로소 밤에도 사람이 살아가는 소리를 듣는다. 멀리서 들어오는 뱃소리와 사람들이 오고 가는 소리는 빛의 세계에서 살아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존재할 자격을 부여해주었다.

 

나는 뫼르소가 감옥 밖에서도 감옥 안처럼 부자유한 삶을 산 껍데기 같은 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굳이 가둘 필요 없이, 그는 삶이 무의미하고 부조리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의 통찰은 진실했지만, 그의 삶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자연 속에서, 이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삶 속에서 존재를 허락하는 '삶의 관조'가 인간을 감동시킨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판에 서서 모든 시선과 빛을 받을 때, 그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감옥에서 누워 별빛을 받을 때, 자연은 그가 존재함을 무관심하기에 따뜻한 빛으로 비췄다. 별빛은 그를 감싸 안지도, 다른 것을 보게 하지도 않지만, 은은하게 비춘다.

 

나는 그래서 뫼르소가 자신의 사형식에 많은 사람이 오길 바랐다고 생각한다. 연극에서는 다소 비장하고 약간 냉소적으로 묘사되었지만, 나는 그가 그렇게 결심하고 독백한 순간 일종의 의미의 화신으로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옛날에 그의 아버지가 사형식에서 구토를 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던 것처럼, 자신의 어머니가 죽음을 앞두고 몸부림치듯 애인을 만들었던 것처럼, 늙은 노인이 가장 사랑하는 개에 욕을 했던 것처럼. 그 무엇보다 어두운 별빛이 모든 곳에서 쫓겨난 한 사형수를 자연 속에서 속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그렇게 신을 거부한 사형수 뫼르소는 마치 예수처럼 자신이 얻은 최고의 가치를 남에게 나누고자 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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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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