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대학로를 찾은 고전 - 햄릿 [공연]

글 입력 2024.09.0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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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or not To be,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는 말로 대표되는 <햄릿>을 둘러싼 가장 대표되는 주제는 삶과 죽음의 경계이다.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을 찾은 이번 <햄릿> 연극은 우리에게 어떻게 사느냐를 전달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연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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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셰익스피어를 좋아도 여전히 그는 어려운 아저씨로 다가오긴 한다. 그럼에도 인물 ‘햄릿’은 이해하기 어려운 아저씨가 만들어낸 나의 친구 같았다. 슬픔 속에서 슬픔을 느끼는 법을 알려주어서다. 전 세계에 햄릿을 연구하고 그 작품과 언어의 깊이를 파헤친 셰익스피어 전문가는 많고 나는 항상 그의 작품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처지다. 연극 <햄릿>은 나에게 친구같았던 햄릿을 이야기할 용기를 가져다 주었다. 늘 감상자의 자리에 있기에 셰익스피어를 어려워하는 이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햄릿>을 이야기해 보고 싶어서다.

 

 

 

철학적 영웅? 비극적인 운명을 한 가련한 주인공?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가장 먼저 나온 작품이 <햄릿>이다. 인물 햄릿에 대한 이해가 먼저다. 명성만큼 많은 영화적 변용과 각색을 거친 햄릿은 이미 다양하면서도 정형화된 프레임을 갖고 있다. 고뇌하는 인물인가 행동하는 인물인가? 우유부단하고 미련한 인물인가. 영웅인가? 행동 후 고민하는 돈키호테와 대조되기도 한다. 영화 ‘라스트 액션 히어로’(1993)'에는 이를 풍자한 장면도 있다. 영어 선생님이 올리비에 감독의 영화 ‘햄릿’(1948)'을 설명한다. 이 영화는 생각만 많고 결단이 느린 고뇌하는 햄릿을 묘사했다. 설명 도중에 한 학생은 담배를 피우는 카리스마를 지닌 마블 같은 영웅의 모습을 한 햄릿(아놀드 슈왈제네거)을 상상한다. 격렬한 전투장면 속에서 용맹함을 떨치는 마블히어로의 햄릿이다.

  

햄릿은 유령을 만나기 전후와 마지막으로 그 유형이 나뉘어 불릴 정도로 한 책 안에서도 다르게 보여지기도 한다. 또 연극, 영화 등의 다양한 콘텐츠 속에서도 인물 햄릿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는 시대적인 정신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번 공연이 표현하려는 햄릿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어린시절 햄릿을 떠올리면 그저 불쌍하고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 이 연극을 보기 전까지도 햄릿만 생각하면 불쌍하다는 마음의 탄식이 먼저 나왔다. 어린 시절 읽은 아동문학의 영향으로 내게 햄릿은 무해한 아이의 이미지였다. 늦은 밤 창가에 기대어 그리운 아버지가 있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아버지의 모습을 한 유령을 보고 있는 햄릿을 상상했었다.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질서와 세계가 뒤바뀐 것. 특히 가장 의지해야 할 가족인 엄마의 재혼이 어린 나이의 그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걱정하며 읽었다. 기존에 내가 갖고 있었던 편견 때문인지 내가 본 연극의 햄릿은 아무리 괴로워도 해야 할 일과 할 말은 하고 마는, 정신적 이상을 보임에도 광기를 숨길 생각이 없는 당당한 인물로 느껴졌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연극의 목적은 벗어나는 법이다. 연극의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자연을 거울에 비추어 보는 일. 옳은 건 옳은 대로, 그른 건 그른 대로 고스란히 비추어 그 시대의 시대상과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3막 2장 중 - 도서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셰익스피어 연구회 지음)

 

연극은 연극일 뿐이라는 연출자의 말을 빌려보자.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햄릿이 전하는 답은 무엇일까. 슬픔 속에서 사는 법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햄릿의 선택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햄릿은 처음에는 나약했고 죽고 싶어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죽음 대신 복수하는 방법을 선택했고,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권리를 줬을 때 복수보다 관용을 선택했다는 점을 조명하고 싶다. 자신의 삼촌을 죽이기로 했지만 그를 죽일 수 있는 최적의 순간에 그는 주저했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우유부단하고 나약한 인물의 프레임으로 햄릿을 해석했다면 이 장면은 그저 기회를 놓친 아쉬운 부분으로 해석될 것이다. 누군가는 그때 왕을 죽였어야지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연극은 이야기 가치를 잃었을 것이다. 그가 망설인 이유는 국왕이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우리의 햄릿은 기도 중인 사람을 죽일 수 없어서 고민 끝에 그를 죽이지 않았다. 기도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일지, 더 옳은 방식으로 복수하고 싶은 햄릿의 의무감과 정의감 때문인지, 그 이유는 독자들이 해석하기 나름이다.

 

햄릿의 선택에서 남은 오점은 ‘광기‘ 뿐이다. 연극과 원작 모두에서 권투대결 중 햄릿은 자신이 폴로니어스를 죽인 것에 대해 자신의 광기가 했다고 말한다. 온전한 정신과 광기를 구분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이분화했다. ‘가여운 햄릿 자신의 적이기도 하네’라며 스스로 만든 자신의 불쌍한 자아에 적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자신의 감정에 따라 자신을 다른 주체로 바라보는 것은 도덕적이지 못하다. 살인에 있어서 개인의 판단, 실수와 단순 감정은 정상 참작의 사유가 될 수 없다. 옳음이라는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햄릿 프레임에 조금 더 당당해질 수 있었을 텐데, 정신착란을 이유로 정상참작을 그의 아들 레어티스에게 요청하면서 조금은 멀어졌다.

 

이번에는 햄릿을 둘러싼 상황을 이해하는 것에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가자. 똑같은 상황이 우리에게 벌어졌다고 가정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유령의 부탁을 그대로 따를 것인가? 유령은 진짜인가? 회의와 진실의 안개를 어떻게 거둘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 또한 무엇이 사실인지 가려내고 행동하기 위해 깊은 수렁에 빠질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햄릿만이 국왕이 자신의 삼촌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현대사회로 같은 현상을 옮겨 놓고 본다면 자신이 직접 이 범죄 행위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려는 선택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 우리는 보다 법과 절차에 따른 선택을 떠올릴 것이다. 경찰에 신고한다거나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고발하는 선택지가 있다. 진실을 알게 된 뒤 개인적인 복수를 하려는 햄릿의 선택이 현대 사회와는 결이 맞지 않다. 사회적 약속에 따라서가 아니라 오직 개인의 사적인 영역으로 복수를 떠올리는 햄릿은 그 시대를 보여주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이중 자아를 표현한 거울 연출은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다.

 

 

 

연극의 마지막 대사 ‘남는 것은 침묵뿐'


 

처음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수미상관 구조를 이루듯 동일하다. 땅에서 손으로 무언가를 들어 올려서 시계를 보듯 손을 쓴다. 인간이 가장 있어야 할 곳이 땅이란 의미인가. 연출자의 의도는 모든 것은 연극일 뿐임을 전하는 데 있었지만 나는 1막 1장에서 나온 ’땅‘이 시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호레이쇼의 대사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연극의 포문을 여는 1막 1장에서햄릿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호레이쇼의 말을 통해 중요한 사건들과 햄릿의 상태가 전달된다. 연극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때 호레이쇼의 대사들은 빛이 난다. 줄리어스 시저에 선왕의 죽음을 비유하기도 하고, 앞으로 닥칠 비극을 넌지시 암시한다. 선왕의 모습을 한 망령을 줄리어스 시저에 비유한 근거로 시저가 살해되기 전날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또 땅속에 재물을 파묻어 둔 것 때문에 죽어 유령이 되어 세상을 떠도는 것이냐고 묻는다. 선왕이 묻혀 있는 곳이 땅속이기 때문이다. 땅에 있어야 할 것이 세상을 떠도는 현상이 비극을 만들어내기에 연극의 그 행위는 비극의 시작과 끝을 관객에게 알리는 장면으로 내게 다가왔다.

 

 

 

‘시대를 관통하는 햄릿’


 

‘슬픔을 느끼며 슬픔 속에서 사는 법’ - 햄릿을 처음 보고 남긴 한 줄이다. ‘사는’이란 표현이 거슬릴 수 있다. 비극적인 결말을 두고 ‘사는 법’을 알려준다고 표현해도 될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 다루고 싶었다는 연출자의 말을 읽었다. 옛 고전이 현대의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하는 연극이다. 그래서 내가 적었던 ‘사는’이란 표현에 의심의 빛을 거두기로 했다.

 

원작에 충실했지만 한글로 표현된 햄릿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원어의 말맛이 그대로 느껴지는 대목도 있었고 내가 좋아하던 눈으로 본 대사들이 귀로 들리고 연기로 보여질 때의 전율과 감동이 있었다. 내게 연극이 된 번역 된 희곡을 읽어내게 해주는 언어의 문법을 처음으로 알려준 매력적인 작품으로 기억될 거 같다.

 

 

[신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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