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왜 햄릿은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도서]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햄릿>이 지금의 우리에게
글 입력 2024.09.0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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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 않아?’ 셰익스피어를 말하면 항상 되돌아오는 메아리 질문이다. 셰익스피어와 어렵다는 감정은 마치 한 세트인 것처럼 붙어 다닌다. 그렇다. 아무리 유명하고 명작이면 뭐할까. 사람들에겐 어렵고 그저 고리타분한 인식으로 다가오는데.

 

연극을 보고 얻은 용기로 셰익스피어를 멀리했던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햄릿의 옆에서 같이 자란 대학생으로서 원작으로 읽은 햄릿을 전하고자 한다. 우리의 마음에서 셰익스피어는 사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그의 작품이 어려움이 아님을 전달하고 싶다는 마음에서다. 알고 나면 곳곳에 있는 셰익스피어의 말들을 통해 이미 우리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과 슬픔의 경계: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가?


 

나에게 햄릿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앞서 행복과 슬픔의 경계를 먼저 생각해보게 한다. 햄릿은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한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은 인물이다. 책에서는 처음으로 발견한 유형의 등장인물이었다.

 

유령을 만나기 전, 슬픔을 느끼며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슬픔에 앞도되는 햄릿이 보인다. 슬픔을 느끼고 싶은 그를 방해하는 세계와 맺은 관계에서 고통의 원인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햄릿의 상식선에서 국왕의 죽음으로 모두가 고통스러워하는 게 자연의 이치다. 하지만 그가 현재 속한 세계는 자연의 법칙에 어긋난다. 국왕의 죽음은 누군가에겐 정치적인 기회로 읽히고, 결혼이라는 새로운 행복을 가져다준 거 같다. 햄릿은 이 이상한 세계에서 간극을 느낀다.

 

따라서 슬픔이란 감정 자체보다 슬퍼하지 않는 타인들의 상식이 햄릿의 고통을 만든다. 모두가 검은 상복을 오랫동안 입고 결혼이라는 축복을 맞이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버지 유령을 볼 정도로 심신 미약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즉, 그의 모친과 삼촌이 자신만큼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했다면 그가 죽음과 삶의 경계 속에서 배회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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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우리에게 - 슬픔도 공감하는 법이 필요하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면 어떻게 타인에게 행복을 전할 수 있을까? 아무리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도 이를 함께 축하할 사람이 없다면?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내가 정의하는 외로움이다. 함께 하는 사회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행복을 나누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축하를 받는 행복의 원리를 정확히 반대로 슬픔의 원리로 돌려보면 햄릿과 그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시작점이 된다.

 

죽은 뒤 자신이 삶에서 사랑했던 사람에게 애도 받지 못하면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또 행복을 느껴 본 사람이 무엇이 행복인지 알듯이 슬픔을 느껴 본 사람이 그 고통의 깊이에 공감할 수 있다. 햄릿 본인 자신만큼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 부재가 비극을 만들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본인이 직접 겪지 않은 타인의 세계를 공감할 순 있지만 깊이 있게 공감하기는 어렵다. 경험이 선행하지 않으면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만 가치 있을 뿐 뱉는 언어는 말뿐인 공감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문학이 필요하다. 문학을 통해서 그 깊이를 간접경험해 볼 순 있기 때문이다. 행복은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좋은 것이지만 슬픔은 그렇지 않기에 간접경험해 봄으로써 내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마음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다.

 

어두운 감정의 길을 걷고 있는 누군가와 보폭을 맞춰주고 싶은 적이 있는가? 내가 알지 못하는 감정의 깊이를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어서, 상대에게 섣부른 위로가 화가 될까 봐 말을 아끼게 되는 순간이 있다.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감정의 넓이와 깊이를 햄릿 같은 작품은 제공할 수 있다. 어딘가에 존재할지 모르는 햄릿만큼 괴로운 사람들에게, 언젠가는 햄릿만큼 괴로울지도 본인들에게 이 작품이 닿기를 바란다.

 

 

 

지금의 우리에게 - 어떻게 선택하고 행동해야 하는가? 


 

햄릿은 매 순간 ‘옳은’ 선택을 내리려고 한다. 그래서 고뇌하는 인물이 되었다. 우유부단하고 슬픔을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인물이라서가 아니다.  인물 햄릿은 행동하는 영웅은 아니지만 독특하고 다른 철학적 영웅을 제시한다. 욕심이라면 욕심인 매 순간 옳은 선택을 내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남다른 괴로움의 깊이를 가진 햄릿을 우리는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한 점에서 결정 내리기를 어려워하는 것을 가리키는 심리 용어 ‘햄릿 증후군’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시대에 따라 인물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듯이 햄릿을 고뇌하기만 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인물로 보기엔 햄릿에게 미안하다.

 

매 순간 가장 효율적이고 올바른 선택을 내리려고 한 적이 있다면 햄릿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최선의 선택을 내리려고 고민한 시간이 허무하게 고민하지 않느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햄릿 또한 모든 순간에서 가장 올바른 선택을 내리려고 고뇌했음에도 결과를 보면 그 선택이 가장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엉뚱한 사람을 죽이게 되고, 햄릿이 처음 계획했던 것과는 다르게 사건들이 펼쳐진다. 

 

우리도 결과를 보고 난 다음에 내가 했던 선택들을 다시 보면 후회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선택은 결과를 예측하고 내리는 것이 아니다. 결과를 보고 다시 돌아가면 모든 선택에는 아쉬움이 깃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햄릿은 자신의 비극을 통해 우리가 고민하는 데 쓰는 시간은 어쩌면 사치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동시에 고민이 되는 이유에 대해서, 더 좋은 선택을 내리고 싶은 마음에 대해서 먼저 이해해 보게 한다.

 

 

 

비극의 시대에 대한 이해 - 자연과 이성의 대비


 

마지막으로 햄릿을 문학 밖의 여러 이야기와 함께 읽어보자.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햄릿을 시작으로 1600년 초기에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다. 이 비극 시대의 출현은 저물어 가던 엘리자베스 시대와 관련되어 있다. 영국과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암울한 시기는 그가 어두운 주제로 작품을 쓰는 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어떤 철학적 고민일까? 역사적인 시각으로 보면 이 시기는 중세에서 이성과 합리의 시대로 넘어가는 지점이다. 신과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중세에서 법과 질서에 의한 사고와 판단을 장려하는 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 셰익스피어는 중세와 초기 현대 사회가 중요하다고 여긴 가치를 <햄릿>에 조화롭게 모두 담았다. 

 

중세와 현대의 대립을 알고 보면 햄릿의 비극 또한 이 대립 지점에서 나온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절대적인 진리와 자연의 섭리를 따르고자 하는 햄릿을 느낄 수 있다. 국왕의 죽음을 슬퍼해야 하는 것, 선왕이 죽은 뒤엔 승계 구조에 따라 다음 사람이 왕위에 오르는 것, 사람이 선택할 수 없는 위치 즉 천부적인 것으로서 왕과 자식 된 도리를 다해야 하는 것들은 중세의 가치에 따른 것이다. 연극은 그 시대와 사람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다는 설명마저 이에 들어맞는다. 유령이 진실을 호도하는 방식 또한 중세 가치를 두고 한 말들이다. 자식 된 도리, 앞으로의 국왕이 될 햄릿의 가족적, 군주제적인 의무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유하는 햄릿의 모습과 그의 일부 대사들은 이성을 중시하는 현대의 모습도 동시에 보여주고 있어 햄릿을 어떤 범주 속에 넣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다.

 

그와 반대 선상에 있는 인물은 햄릿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의 모친과 결혼한 삼촌 ‘클로디어스’이다. 그는 법과 정의의 가치를 수호하고 인간이 판단의 주체가 되는 현대사회의 가치를 더 따른다. 왕이 되는 것은 개인이 바꿀 수 없는 자연의 질서였다면 그의 존재는 왕위 찬탈 행위는 왕의 자리 또한 개인이 선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전사적인 왕의 모습보다도 외교와 말로서 국가의 일을 처리하는 것 또한 현대에 가까운 정치 형태이다.

 

문학사적으로도 이 시기엔 비극이 유행하였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당시 유행한 비극 작품들과 차이가 있었다. 복수를 어떻게 하면 가장 자극적으로 하여 독자들을 당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아닌 복수를 가장 올바른 방식으로 하게 하기 위한 철학적 고민을 함께 담았다. 재혼, 근친상간, 비극과 같이 그 내용과 전개에서 햄릿과 비슷한 주제를 담은 자극적인 작품은 현대에도 많다. 하지만 모든 작품이 햄릿 같은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유령과의 대화, 햄릿의 대사 하나하나 우리가 사유해야 할 가치와 힘을 알아보고자 하는 노력은 의미 있다.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은 현재에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모두 한 번만 살다 죽는 인생이지만 셰익스피어는 이미 여러 번을 산 거 같음을 매번 느낀다.

 

 

 

지금의 우리에게 - 질서와 혼란의 경계


 

햄릿은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우리가 어떤 가치를 택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게 한다.

 

“The time is out of joint. That ever I was born to set it right.” (1막 5장)

 

가장 좋아하는 대사 중 하나다. 햄릿의 운명을 대하는 자세가 가장 잘 드러나기도 하지만 표현 자체로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연극은 이를 ‘뒤틀린 세상’으로 표현했지만, 원문을 통해 보면 관절이 어긋난 것처럼 시간이 흘러간다는 의미에서 '뒤틀렸다'는 말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골격이 어긋났을 때, 부러졌을 때 고통을 생각해 보자. 누군가는 바로잡아야만 그 관절을 다시 쓸 수 있다. 정상적인 생활, 올바른 것을 위해서 햄릿은 자기 자신이 바로잡는 역할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선택을 남겨야 인간 내면의 악을 꺼내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떤 사회가 더 올바른 사회인가? 사회는 늘 여러 사람과 여러 가치들이 중첩된 혼란스러운 세계이다.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악은 세상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욕망과 슬픔 속에 혼재된 거 같다. 아직도 정답이 없는 고민을 셰익스피어는 하게 한다. 

   

*

 

짧은 식견으로 걸작 <햄릿>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실은 부끄러웠다. 10년 뒤에 햄릿 감상을 남긴다면 더 많은 것을 경험한 만큼 더 많은 것이 보여 더 좋은 것을 , 더 가치 있는 글을 남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음을 한 번이라도 느껴볼, 혹은 느껴 본 사람들에게 햄릿이 전하는 이야기는 꼭 닿아야 한다고 느꼈다. 이는 지금 어리숙한 관점으로, 경험한 것보다 경험해야 할 게 더 많은 나의 시선으로 꼭 남겨야겠다는 다짐이 되었다. 용기를 내서 전해 다른 누군가에게도 햄릿과 셰익스피어가 나와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느끼길 바란다.

 

‘In My Mind’s Eye’ (1막 2장, 어디에서 선왕을 볼 수 있느냐고 물음에 대한 햄릿의 답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책은 유용하지만. 햄릿이 이야기하는 마음의 눈은 사물이 지닌 유용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셰익스피어는 후대에 어떤 명령을 내리기 위해 책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읽다 보면 복잡한 세상만사 속에서 무엇이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해하기 어려워도, 그의 영어 표현들을 완벽히 해석할 수 없어도 느낄 수 있는 무언가로 셰익스피어를 우리 마음의 방에 두기 충분하다. 셰익스피어를 느껴보고자 하는 현대 독자들에게 셰익스피어를 곁에 두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러한 점에서도 셰익스피어는 정말 인생을 여러 회차 산 거 같다.) 이왕이면 정수로 뽑히는 4대 비극을 먼저 곁에 두길 추천한다. 그 시작이 햄릿이 되면 어떨까?

 

 

[신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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