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선선한 여름밤이 그립지만, 우리에겐 노래가 남았잖아요 - 여름밤, 시인을 위하여 [음악]

글 입력 2024.09.02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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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이 울긋불긋 물들고 떨어질 때부터 나는 여름을 기다렸다. 무더위에 지칠 때쯤 피로를 싹 풀어주는 밤바람을 느끼고, 장맛비의 노래에 귀 기울이고, 촉촉한 흙냄새를 맡으며 밴드 '시인을 위하여' 의 '여름밤'을 듣고 싶었다.


내가 공부 중이던 나라에서 세 계절이나 더 기다려야 했던 여름을, 나는 내 예상보다 더 빨리 만나게 된다. 내가 기억하는 여름의 냄새를 가진, 나의 고향 한국에서.


한국에서 한여름을 보낸 것은 약 3년 만이었다. 개강 전에 꼬박꼬박 본가로 내려가서 에너지를 충전하곤 했지만, 방학은 여름을 제대로 경험하기에는 너무 짧았다. 오랜만이라 익숙지 않았던 걸까, 급속화된 지구 온난화 때문일까. 한국의 여름은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지독한 더위에 숨이 턱턱 막히게 더워서 한 발짝도 나가기 싫었고, 외출 하고 들어오면 지쳐서 긴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더위가 가셨을 때 다녀오곤 했던 저녁 산책도 당연히 먼 나라 이야기였다.


내가 찾아다니던 여름은 더 이상 실재하지 않았지만, '여름밤'을 들으면, 내가 그리워 했던 여름 어느 날이 파노라마처럼 쫙 펼쳐졌다.

 

 

당신과 나 그날 그 밤

만남을 기억하나요?

우수수 떨어지는 여름 빗방울은

우산 속 비밀스러운 이야기됐고

 

 

화자는 그날 그 밤의 만남을 기억하냐고 운을 띄운다. 비가 오는 날이었나보다. 그날 우산 속에서 오고 갔던 비밀 이야기는 둘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우수수 떨어지는 여름 빗방울은 우산과 함께 그들의 이야기를 숨겨주고, 그 어느 선율보다 아름다운 음악이 되어 순간을 장식했으리다.

 

 

파르르 떨어오는 여름 나뭇잎은

아지트 우리만의 선풍기 같네

 

 

도란도란 여름의 추억은 그뿐만이 아니다. 살랑이는 바람에 파르르 떨어오는 여름 나뭇잎, 초록색이 주는 싱그러움은 활기를 불어넣는다. 하물며 쨍쨍하게 더운 한 낮에는 그 빛깔과 움직임이 마치 선풍기 바람처럼 반가웠겠다.

 

 

빙그르르 돌아간 귀갓길에

화음을 맞춘 매미들 노래

개구리 울음소리 맞춰 걷다 보면

어느새 그대 보낼 시간이었지


잔잔히 다가온 손 서로 스치면

손부채 재빠르게 더위를 식히는 듯

모른 척 여름밤의 연기를 했던

 

 

화음을 맞춘 매미들 노래, 개구리 울음소리를 맞춰 걷다 보니, 헤어질 시간이다. 어느덧 화자가 된 나는 아쉬운 마음에 상대방을 붙잡았다. 마루에 나란히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는데, 잔잔히 다가온 손이 서로 스쳐 얼굴이 달아오른다. 달아오른 이유를 알면서도 우리는 더위를 핑계로 황급히 손부채질을 시작했다. 알면서 모르는 척 연기를 했던 여름밤 풍경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여기까지는 가사를 따라가며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들이다. 나는 이상하게 이 노래를 들으면 또한 어릴 적 외할머니와 보낸 시간이 떠오른다. 사랑을 듬뿍 받았다. 할머니 눈에 나는 어떤 유명한 학자들보다도 똑똑한 천재였으며, 예쁜 말만 골라 하는 사랑둥이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을 들어주셨는데, 할머니의 논리에 따르면 좋은 일이 있으면 내가 잘한 덕,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는 나를 알아봐 주지 못한 사람들의 탓이었다. "에이, 할머니는 과장도!"라고 쑥스러워했지만, 그 무조건적인 응원에 나는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다시 나아갈 힘을 얻었다.


누누이 들었던 말이지만, 어릴 적 아기 침대에 바로 서서 방긋 웃던 나를 아침마다 보러 가는 것이 할머니의 행복이었다고 한다. 다행이다. 내가 받은 사랑만큼이나 내가 할머니의 행복이었기에.


이 노래를 들으면 할머니가 해주던 늘 같은 옛날이야기, 전매특허 바삭한 호박전, 우리 똑똑새, 원 박사라는 애칭으로 다정하게 나를 부르는 할머니가 그립다. 지난 기억을 회상하는 내용과 보컬 분의 다정한 목소리 때문일까?


지금은 내가 좋아했던 선선한 여름밤도 열대야에 힘을 잃었고, 사랑하는 할머니도 나를 잊어간다. 변해버린 상황이 그립고, 달라진 과거를 떠올리는 것은 아프지만, 그럼에도 소중했던 기억이기에 간직하고 싶다. 모든 게 변해도, 이 노래는 변하지 않고 남아,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가만히 있던 마음도 울렁이게 한다.


오늘도 '여름밤'을 듣는다. 다음 여름은 더 시원하기를 소망하며, 행복했던 순간들을 추억하며, 다가오는 계절을 맞이한다. 그리고 앞으로 그리워질 오늘을 열심히 살아간다.

 

 

[원정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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