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저 그런 이해와 아무래도 좋은 사람의 구멍 - 이방인 [공연]

연극 <이방인>
글 입력 2024.09.02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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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모두 낯선 이다. 지극한 노력을 통해 타인을 탐구한다고 해도, 그 결론은 언제나 비슷하게 도출된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다.’ 이러한 결론은 나에 대한 타인의 탐구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그저 그런’ 정도로만 이해하며 살아간다. 타인에 대한 타인의 어느 정도의 이해로 만들어낸 가상의 울타리가 사회다. 우리는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 머물 때 서로에 대해 안전한 존재가 되리라 믿는다.


다만 이 울타리 바깥에 머무는 이들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사회적 수준에서 쉽게 이해받지 못할 개별적 존재들. 이 존재들의 대표격이 될 인물 한 명을 창조한 뒤 끝내 이해 받지 못한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 유명한 한 소설은, 그 예술적 형식을 바꾸어가며 여전히 이해의 확장을 구하고 있다. 사회는 모두를 넉넉히 붙잡을 수 있지만 한 개인을 온전히 담기엔 여전히 작고 좁은 울타리다.


극단 산울림의 연극 <이방인>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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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문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이름일 뫼르소(전박찬)는 한없이 무정한 인간처럼 보인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어머니가 지내던 양로원을 찾는다.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도 슬픔을 드러내지 않는 뫼르소를 보는 주위의 시선은 당황스럽다. 그가 마치 늙은 어머니를 버렸다는 듯 바라보는 싸늘한 시선 속에서도 뫼르소는 어떠한 동요 없이 담담하다. 그를 지배하는 것은 알제리를 덥히는 뜨거운 태양의 열기와, 소란과, 냄새와, 피로감뿐이다. 장례를 마치며 뫼르소는 어떤 종류의 기쁨마저 느낀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슬픔을 드러내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결핍된 사랑의 증거라고 쉽게 치부해버린다.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것은 그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마땅히 사랑해야 할 누군가(특히 자신의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영혼이 타락한 것이라고. 훗날 뫼르소의 눈물의 부재는 영혼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진다. 사회가 만든 울타리는 죽음(혹은 삶)이라는 사건을 중심에 가져다 놓은 뒤 나머지 행동을 그 사건에 대한 보조적 지위로 묶어버린다. 뫼르소는 그러한 사회적 울타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에게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슬퍼하지 않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밀크커피를 마시는 것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과는 분명 별개의 일이다. 뫼르소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향해 고백해야 한다. 자신은 정말로 어머니를 사랑했다고.


내면을 알 수 없는 뫼르소란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문장은 하나뿐이다. “아무래도 좋다”는 것. 불량배 레이몽(장세환)의 친구가 되는 것도, 사랑은 아닌 것 같지만 마리(이현지)와 결혼을 약속할 수 있는 것도, 뜨거운 태양 아래서 아랍인을 총으로 쏴 살해하는 것도. 그는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억지로 노력해야 할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타인이(혹은 사회가) 그를 이해할 수 없듯 뫼르소도 자신을 향한 사회의 요구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영원히 좁힐 수 없는 이해의 간극 앞에서 뫼르소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


살인을 저지른 뫼르소를 재판장에 세운 것까지는 마땅한 사회의 일이다. 다만 그 울타리 경계를 기준으로 뫼르소에게 눈물을 요구하는 일, 눈물의 부재를 해명하도록 강요하는 일, 끝내 해명에 실패한 그를 영혼이 없는 태생적 범죄자로 치부하는 일은 경계를 넘어가는 행위다. 사회와 타인과 나의 관계를 도식화하면 이렇다. 사회라는 울타리가 있다. 그 안에 자신만의 울타리를 친 채로 머무는 개인들이 있다. 당신의 울타리와 나의 울타리. 독립된 울타리가 지키는 것은 실존이라는, 끝이 보이지 않는 각자의 깊은 구멍이다. 그 구멍은 사회 울타리의 부분집합이 아니다. 타인이 보는 2차원적 시선으로는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각자가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완벽히 독립된 사회의 여집합이다.


“법은 아주 잘 만들어져” 있기에, 뫼르소의 사형을 구형하는 검사(박윤석)의 논리는 유려하게 이어진다. 다만 지나치게 매끄럽게 포장되어 문장과 문장 사이 쉼표를 읽지 못한 채 미끄러지는 것뿐이다. 그 쉼표를 섬세하게 늘여 쓴다면 어떨까. ‘나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고(그러나 나는 어머니를 분명히 사랑한다), 마리와 사랑을 나누고 레이몽과 친구가 되었으며(그것은 정말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총으로 아랍인을 쏘았기에(이마를 찌르는 강렬한 태양의 열기에 두려울 정도로 취하고 말았던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처럼(모든 사람은 죽는다. 그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나는 기꺼이 죽는다(누구도 나를 죽음에서 구원할 권리는 없다).’


이 쉼표들이 우리가 차마 보지 못한 가장 깊은 구멍이다. 이 구멍은 법의 허점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우리의 태생적 맹점이다. 어떤 존재들이 여전히 그 구멍에 있다. 그저 그런 수준의 이해와는 타협할 수 없는 존재, 단일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그들의 이름을 문학의 힘으로 간신히 묶어낸 말이 이방인이다. 그것은 우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어떤 사회를 구상하든, 모든 사회적 논의는 그 구멍을 들여다보는 일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지금까지도 ‘이방인’을 완벽히 이해한 사람은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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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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