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뫼르소가 관객에게 걸어간다 - 이방인 [연극]

글 입력 2024.09.02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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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산울림의 레퍼토리 연극 <이방인>이 6년 만에 소극장 산울림으로 돌아온다. 연극 <이방인>은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을 원작으로 충실히 구현하되, 원작 속 연극성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독백과 대화, 서술과 연극의 공존 속에서 이방인이라는 세계는 뫼르소의 시선으로 재구성된다.

 

 

 

나는 나의 이방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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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은 프랑스어로 ‘L'Étranger’이다. 예전에는 영어로 ‘the stranger’인 ‘L'Étranger’가 한국어로 ‘이방인’이 되는 것은 어색하다고 생각했었다. ‘이방인’의 국어사전 상 정의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으로 국경에 의한 경계에 초점을 맞춘 단어이기 때문이다. 반면 tranger 혹은 Stranger의 경우 ‘낯선, 생소한, 어색한, 이상한’과 같이 더 너른 해석이 가능하다. 나는 이것들로 뫼르소를 그려왔다.


<이방인>은 1부와 2부로 구성된다. 1부가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 뫼르소의 일상이라면 아랍인 총살 이후 2부는 뫼르소에 대해 이루어지는 재판 과정이다. 빠르게 전개되는 2부와 달리 1부는 뫼르소라는 사람에 대한 일종의 스케치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이웃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며, 애인과의 데이트를 즐기는 뫼르소의 평범한 일상은 그의 무심한 태도 위에 흘러간다.


뫼르소는 자신을 타인으로 대한다. 그는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 연극에서조차 관객인 양 일신의 행위를 인식한다.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음은 자기 파괴가 아닌 무던함이 된다. 그는 살 이유가 없는 것과 같은 이유로 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하여 뫼르소는 자신에게 이방인이다. 뫼르소는 모든 세계에 앞서 자신의 이방에 존재한다. 뫼르소는 자기의 삶을 살지 않는다.

 

 

 

세상의 이방인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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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뫼르소의 태도는 기행인가. 자신의 삶을 살지 않음은 부조리한 세계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일반적 태도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2부 재판 과정에서 뫼르소의 무심함은 유죄의 근거로 짜맞춰진다. 그의 일상은 평범한 것이 될 수도 기행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해져있다기 보다 정해져 가는 것에 가깝다. 어머니를 요양원에 맡긴 것, 어머니의 죽음에 울지 않은 것, 어머니가 죽은 다음 날 애인을 사귀고 코미디 영화를 본 것, 질 낮은 친구를 사귄 것. 그 모든 것이 뫼르소가 죽어야 하는 이유로 돌아온다. 아랍인을 향한 총격이라는 사건은 오히려 바깥으로 밀려난다.


변호사와 판사의 공방이 오고 가고 구원을 기약하고자 목사가 찾아오지만, 이 모든 사건 흐름에서 당사자인 뫼르소는 비껴나 있다. 뫼르소에 대한 이야기는 뫼르소를 빗겨나 진행된다. 원인은 결과를 빗겨나며 그 모든 것은 완전히 관련 없는 것처럼 분산된다. 내내 침착함을 유지하던 뫼르소가 사형 선고를 앞두고 토하듯 뱉어내는 독백은 공포와 포기를 모두 포함한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미치지 않고 살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배우고 익힌다.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믿음을 공유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무엇도 우리는 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내가 하는 어떠한 선택도 행동도 세상에 어떠한 의미도 남길 수 없다. 그것은 야만과 포기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무엇도 의미를 남길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믿은 뫼르소라는 인물이 자신도 소외시킨 채 세계의 이방으로 내쳐지는 <이방인>을 보며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뫼르소가 관객에게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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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극 <이방인>을 보며,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자체가 지닌 연극성을 크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인생조차 본인의 것으로 살아내지 않는 1부 뫼르소의 모습은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의 모습과도 같았다. 분명히 살아 있지만 관찰자가 되어버리는 뫼르소의 태도를 독백과 연기를 통해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이는 2부 재판 과정 중 세상과의 불화가 전면화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깊은 무심함과 절망 사이 뫼르소의 간극은 원작이 지닌 연극성을 충분히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원작이 있는 연극에 대한 염려는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원작이 지닌 고유성을 극이라는 호흡이 전혀 다른 매체로 전달하는 과정에 대한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6년 만에 다시 산울림 소극장에서 펼쳐지는 연극 <이방인>은 이러한 염려를 놓고 찾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진세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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