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은유와 추상 그 너머의 이해 - 다큐멘터리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영화]

이해한다는 말에 대하여
글 입력 2024.09.03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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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입이 없어.

 

나는 항문도 없어.

 

나는 살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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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와 추상 그 너머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질병은 미화 혹은 비하의 의도를 가진 은유(metaphor)가 덧씌워진 채 소비되어 왔으며, 질병 자체만큼이나 질병에 대한 왜곡된 은유와 그로 인한 낙인효과가 환자들을 괴롭게 해 왔다고 수잔 손택은 설명한다.

 

예컨대 폐결핵은 가녀린 신체와 예민하고 창조적인 내면이라는 낭만주의, 암은 벗어날 수 없는 공포와 죽음이라는 극단주의적 은유가 덧씌워진 대표적 사례들이다. 이처럼 은유는 질병의 본질을 가리고 치료를 더디게 만들며 환자들을 이중의 고통에 고립시킨다. 손택의 말마따나, 은유는 필수 불가결인 존재이지만 그러한 은유를 사용하는 데에는 반드시 신중을 기해야 한다.


김보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섭식장애를 다룬다. 외모지상주의가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 섭식장애는 다이어트와 외모 강박의 결과라는 은유를 뒤집어쓰고 있다. 그러나, 실상 전문가들은 섭식장애 호전을 위해서는 가족 상담과 같이 내면의 트라우마를 들여다보는 과정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섭식장애는 단순한 루키즘의 부작용으로 치환되어선 안 되며 그 자체로 개인의 복잡한 정신과 내면을 반영한 결과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다큐멘터리가 갖는 가장 큰 의의 중 하나는, 섭식장애에 씌워진 추상성의 망토를 벗겨내고 '채영'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은유 너머의 실존을 응시했다는 점이다.

 

 

 

이해한다는 말에 대하여


 

(1) 뜻밖의 각본

 

오랜 기간 섭식장애와 함께한 채영, 그런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던 상옥, 두 사람의 대화는 단순히 질병의 예후에 대해서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4년이라는 제작 기간 그들이 나눈 대화는, 이해받고 싶었던, 그러나 차마 이해하지 못했던 삶의 궤적을 더듬는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질병보다도 이해에 관한 영화라고 느껴졌다. 상옥은 발병 이후 채영이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는지 물었다. 그러나 채영으로부터 돌아온 답은 그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채영에 따르면, 섭식장애를 통해서 비로소 그는 자유를 느꼈고 삶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채영이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건 위태로워 보이는 상옥을 위해서였으며, 입원을 결정하고 식이를 조절할 때는 치료받는다기보다 삶의 주도권을 반납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홀로 채영을 키운 어머니의 무관심과 그런 어머니를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던 어린 채영의 기억은, 그가 먹기를 거절하거나 마음껏 먹을 때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허함에서 벗어나 진취적이고 자유롭다고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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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옥은 말한다. 너에 대한 수백 가지 각본을 썼는데, 지금 네가 말한 각본은 참 뜻밖이네. 수백 가지 추측 중 단 한 개도 들어맞지 않을 만큼,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어렵다. 그런데 정작 이해한다는 말의 뜻은 뭘까. 상옥의 이해가 두 선이 완전히 겹친 상태라면, 채영의 이해는 두 평행선이 방해받지 않고 나아가는 상태다.

 

어쩌면 젊은 시절 운동권에 몸담았던 상옥에게는 그런 삶의 방식이 익숙했을지도 모른다. 이해하고 이해받기 위해 부딪혀서 비틀고 변화를 일구어내는 게 운동의 방식이니까. 다만 채영은 모두의 삶이 꼭 같지는 않으며 바꾸려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원했다. 바라는 게 있었느냐는 상옥의 말에, 엄마가 아무것도 안 했으면 좋겠다는 채영의 대답 역시, 이해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로부터 온 것이다.

 

감독은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 고민하다가, '너랑 나랑은 계속 평행선이네'라는 상옥의 말을 듣고 마지막 장면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말 직후 채영의 말도 꽤 인상적이다. 평행선이 어때서?

 

사람들이 겹치지도 접하지도 못한 채 평행선을 그리는 건 어쩌면 자연스럽다. 모두 다르게 태어나 다른 경험을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평행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지 그렇지 못하는지에 있다. 소중한 사람을 바꾸려 들지 않고 그대로 직진하게끔 응원해 줄 수 있는가? 이해한다는 말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선행된 후에야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이 '두 모녀'가 아닌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인 데에도 이유가 있어 보인다. 모녀 관계라고 하면 핏줄로 연결된 만큼 서로 충분히 이해하고 모두 꿰뚫어 보고 있을 것만 같은 오인이 발생한다.

 

그런데 '모녀'는 이어짐을 전제하지만, '사람'은 이어지고 싶은 마음을 필요로 한다. 채영과 상옥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사람'임을 먼저 인정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관을 갖고 존중받을 가치가 충분한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한 '사람'.

 


(2) 불편한 대화

 

채영과 상옥의 대화는 불편하다. 어떤 관객은 자신도 어머니와 이런 대화를 해 보고 싶다고 말했지만, 내가 느끼기에 둘의 대화는 불편한 질문과 어정쩡한 답변 그리고 어색한 납득의 반복이었다. 특히 상옥이 채영에게 툭 툭 던지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나 역시 경험했던 어머니와의 갈등이 떠오르고 괜히 식은땀이 나는 듯했다.

 

그런 불편함, 어쩌면 그게 이해의 본모습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은 절대 한 번에 이루어지지도, 영화처럼 눈물 나게 감동적이지도, 마냥 행복하고 즐겁지도 않기 때문이다. 나와 타인 사이에는 무지의 장벽이 우뚝 서 있다. 이 벽은 서로 이해할 수 없게 방해하는 장벽이지만, 이 장벽은 서로의 부정적인 면모까지도 가리며 거리감을 확보해 주기에 오히려 무심한 편안함과 보호를 제공한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할 때는, 그 장벽을 무너뜨리고 실체를 마주하며 불편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었을 때다.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채영의 섭식장애에는 유년기에 어머니 상옥과의 불안정한 애착 형성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렇다고 채영의 섭식장애를 단순히 상옥의 무심함 탓으로 돌리기에는 사회가 공유했어야 하는 지대한 책임의 부재를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김보람 감독은 아프리카 교환학생 때 현지 친구의 집에 놀러 갔던 기억에 해 이야기한다. 아이들 여럿이 한 방 한 침대에 모여서 자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아이들이 함께 자라나는 따뜻한 마을 풍경에 대해서.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은 백 퍼센트 사실에 기반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처럼 아이가 공동체에서 자라날 때, 아이를 키우며 발생하는 문제는 공동의 책임이 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육아에 대한 책임은 주로 어머니라는 개별 양육자에게 온전히 전가된다. 그로 인해 어머니 역할을 떠맡은 여성 개인이 육아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더라도, 이를 뒷받침해 줄 제도와 공동체가 부재하다.

 

상옥이 몸담았던 운동권이 뿔뿔이 흩어진 뒤, 상옥은 제대로 된 취업도 하지 못한 채 '패잔병' 신세가 되어 홀로 채영을 양육해야 했다. 그런 상옥이 심각한 우울과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조차 그는 기댈 사람 없이 닥치는 대로 일하며 아이를 키워 내야만 했다. 그때 상옥의 힘이 되어 줄 누군가 있었더라면, 상옥을 대신해 채영을 돌볼 수 있는 제도가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개인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기에, 섭식장애의 원인은 단순히 환자 자신 혹은 가족으로부터만 찾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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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가까워지기


 

다큐멘터리 상영 이후 이어진 '감독과의 대화'에서, 정작 채영과 상옥은 편집된 다큐를 본 이후 '이게 무슨 내용이에요?'하고 물었다는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채영은 아직 완치되지 않았고, 해결책이 궁금했던 상옥에게 다큐는 이렇다 할 지침을 내려 주지 않았다. 김보람 감독의 전작 <피의 연대기>와는 달리,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어떤 명쾌한 주장이나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의 핵심은 '해결'과 '완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똑바로 보기. 분명한 것은,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이후, 채영과 상옥, 그리고 관객들은 서로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더 깊어진 이해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어머니에 대해, 딸에 대해, 섭식장애에 대해, 그리고 사회에 대해서.

 

카메라를 통해, 우리는 은유의 망토를 덮지 않은 실존의 관점에서 섭식장애를 바라보고, 채영과 상옥의 대화를 통해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를 떠올려 본다. 이해는 0과 1의 스위치가 아닌 스펙트럼상의 개념이다. 수백수천 개의 각본과 추측과 단정을 넘어, 이 광활한 스펙트럼 위에서 서로 한 발짝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었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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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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