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비로소 죽음을 통해 - 연극 이방인

이방인을 보는 당신들 또한 이방인이다.
글 입력 2024.09.03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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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며 죽음을 단 한 번이라도 의식하지 않는 인간이 있겠는가. 사회적 죽음이나 자아의 죽음을 제하고서라도. 서 있는 그곳의 지반이 무너지는 듯한, 글자 그대로의 죽음. 한 인간으로서의 피와 살이 생명을 잃고 먼 지하로 흩어지게 되는 그 죽음을 말이다.


나의 체면과 존재감, 나아가 정신과 감정들, 마침내는 나의 육체까지. 그 죽음을 인지하게 된다면,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누구든 공포에 몸을 떨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떨리는 몸은 살아있는 나를 증명하는 가장 생생한 증거가 될 것이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죽음을 마주한 인간이 느끼는 부조리를 그의 첫 작품인 <이방인>을 통해 발화했다. 그의 덤덤하고도 열렬한 문장들은 세계 곳곳에 존재한 인간들의 이목을 이끌었고, 출신과 인종, 가치관이 다른 수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았다.


그리고 극단 산울림의 레퍼토리 연극으로 2017년 초연된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을 무대 위로 데려오기 위해 재연과 재연을 거치며 숱한 노력을 기울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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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는 유명한 속담이 있다. 많은 이들은 이 속담을 접할 때 박힌 돌에 이입한다. 박혀 있었던 돌은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한순간에 자리를 잃고 떠돌게 되었는데. 굴러온 돌이 얼마나 원망스럽겠는가. 이러한 현상, 즉 박힌 돌에 이입하는 이들의 공감은 비단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비슷한 격언은 한자로도, 영어로도 존재한다.


주인공 뫼르소를 제외하고, <이방인>에서 묘사되는 이들은 모두 박힌 돌이다. 그들이 갖춘 것들, 그들의 구축한 환경들을 유지하고자 하는 부류. 이러한 이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도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유형이다. 그리고 어떤 주체(主體)라도 쉽게 이입할 수 있을 만한 객체(客體)다.


객체들은 그들이 가진 강한 신념과 감정, 관계를 지키고자 한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그들 삶의 주체이다. 그러므로 헷갈린다. 그들이 아닌, 굴러온 돌일 어떤 이가 말이다. 굴러온 돌도 그 삶의 주체이지만, 박힌 돌들에 맞춰야만 할 것 같고, 적당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 뫼르소의 매력은 정확히 그 반대되는 지점에서 나온다.


뫼르소는 친구가 없다. 친구라고 부를 만한 관계는 있을지라도.

 

연인도 없다. 연인이라고 부를 만한 관계는 있을지라도.

 

돌아가신 어머니도, 어머니가 잠시 머물렀던 양로원의 원장도, 그를 심판하려 했던 예심 판사도, 뫼르소의 행실을 비난하려 했던 검사도, 뫼르소를 옹호하려 했던 변호사마저도, 뫼르소에게 영향을 주진 못했다. 뫼르소는 그저 그곳에 존재했을 뿐이다. 뫼르소와 함께 하려고 하든, 뫼르소를 배제하려고 하든, 어쨌든 간에, 뫼르소 주위에 있는 박힌 돌들이 그와의 관계를 정의하거나 그를 평가하려고 했을 뿐이다. 타인으로부터의, 세계로부터의 모든 손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거부(拒否)한다. 아무도 쉬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작품에서 묘사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선호하는 것도, 선호하지 않는 것도 없어 보이지만, 뫼르소는 유일하게 태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그리고 바다로 뛰어들고자 한다. 뫼르소는 굴러온 돌이 아닌, 누군가의 무엇도 아닌 상태로 그저 존재하고 싶었다. 뜨겁고 이글거리는 누군가의 시선과 강제로부터 벗어나 차갑고 출렁거리는 바닷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그렇게, 자기 자신만의 욕구와 생각에 빠져 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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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인지한 뫼르소에게는 “대답하라”는 압박이 쏟아지는데, 그의 머리 위로 다시 태양이 강렬한 빛을 비춘다. 그는 태양과 같이 불타는 주황빛인 듯하면서도 결국엔 무심(無心)한 인정을 내뱉거나 푸른빛의 무언(無言)을 유지한다. 이내 감옥에 버려진 뫼르소는 끝이 없는 생각에 시달리는 채로 남아 있다. 누군가로부터의 구원도 울부짖으며 거부하고서.


꼬리를 문 뱀의 형상을 한 동그란 감옥 안에서, 뫼르소는 그의 머리를 바닥에 꿍꿍 부딪히며, 자기 자신을 잡아먹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한때는 자기와 함께 하려 했던 이들의 얼굴과 미래를 떠올린다. 그렇게 점점 죽음을 직시(直視)해 간다.


죽음이라는 판결 아래, 죽음을 향한 재판 속에서, 정확히 “답이 없음”, 또는 “답을 알 수 없음”을 직면(直面)한 뫼르소는 끝의 끝을 상상하며 그의 작고(作故)한 모친을 떠올린다. 뫼르소와 같이 죽음을 앞두었음을 감각했을 어머니를 떠올린다. 이내 궁금해한다. 그의 어머니는 어떻게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를 내었을지, 그런 동력은 어디서 얻었을지.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세상과 함께 부정해왔던 자기의 삶을 감각하게 된다. 죽음 앞에서야 삶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삶에 대한 열정을 얻는다. 수많은 객체들에 의해 가려져 있던 온전한 삶을 바라보게 된 뫼르소는 비로소, 세상과 화해한다. 자기 자신을 갖고서 객체들 앞으로 나아갈 것을 다짐한다. 그들이 지르는 함성이 증오를 담고 있을 것을 예상하면서도, 기꺼이 그것을 환영할 것이라 다짐하며. 까마득한 끝의 장막(帳幕) 너머에서 발견한, 뫼르소의 또 다른 미래였다.


**


카뮈는 이방인과 같은 해에 발표한 <시지프 신화>에서 그의 소신과 철학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냈다. <시지프 신화>에 따르면 “답이 없음”, “답을 모르겠음”, “가치를 찾을 수 없음”을 마주한, 한 단어로 말하자면 부조리(不條理)를 마주한 인간이 세상을 거부하고, 고뇌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카뮈는 필연(必然)으로 보았다. 동시에 그로부터 인간이 찾게 되는 행로로 자살(自殺)과 종교에의 귀의(歸依), 반항(反抗)을 제시한다. 삶의 가치를 찾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삶의 가치를 찾고자 교리를 취하거나, 자기 삶을 부여잡고 세상에 반항하며 동시에 세상과 화해(和解)하는 것. 이 세 가지 방법이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에 존재하는 카뮈의 세계관 속 정답인 것이다.


<이방인>은 어쩌면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말했던 화해(和解)를 행하는 이를 보여주고자 한 한 편의 희곡(戲曲)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극단 산울림에서 각색해 낸 연극 <이방인>은 더 큰 의의를 가지는 듯하다. 카뮈의 언어를 군더더기 없이 제련하고, 배우들의 흐르는 듯한 감정 선과 함께 시너지를 만들어 내는 섬세하고도 강렬한 연출은 더할 나위 없이 깔끔했다.


연극을 통해 <이방인>을 처음 마주하는 관객들은 극이 다소 어렵다고 느낄 수 있다. 극이 끝나고 나오는 길에 도서관에 들러 원작인 카뮈의 책을 빌려보기도 할 테지만, 카뮈의 언어 또한 연극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러 해석을 찾아보지만 애석하게도, 그 작품을 이해하려고 수많은 해석을 시도할 때 외려 카뮈와 그의 철학이 가진 진의(眞意)를 헷갈리게 될 수 있다. 이내는 연극에서 받았던 이름 모를 감각들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방인>을 보는 당신들 또한 이방인이다. 군중(群衆)이지만 동시에 객체(客體)다. 맞는 해석도 없고, 틀린 해석도 없다. 뫼르소가 찬찬히 읊조리는 그만의 감상에 올라타, 이방인으로서의 감각, 부조리를 느끼며 온전히 공감하기에는, 연극 <이방인>만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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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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