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칵테일, 러브, 그리고 좀비 [도서/문학]

조예은 작가의 <칵테일, 러브, 좀비>
글 입력 2024.09.03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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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좀비 영화는 다른 공포물만큼 후폭풍이 남지 않는다. 부산행을 보고 그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2시간 동안 손에 땀을 쥐다가도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누구보다 뽀송해지는 것이다.

 

아마도 좀비가 유달리 비현실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새벽 2시, 침대맡에 소복을 입은 처녀 귀신이 서 있는 상상은 해도 좀비가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상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예은 작가는 '좀비'를 현실로 데려왔다. 뉴스에서는 마치 코로나바이러스를 안내하듯이 좀비 바이러스를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긴박하게 브리핑하던 아나운서가 좀비에게 목덜미가 뜯기는 장면을 연출하는 대신, 강남의 한 국밥집에서 제공한 뱀술이 원인이었다고 차분하게 설명한다.

 

이처럼 비현실적인 오브제를 현실적인 배경에 자연스럽게 섞어 놓는 것은 조예은 작가의 특기다. 덕분에 독자들은 작가가 선사하는 판타지 속으로 어렵지 않게 빨려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몰입을 하려면 책으로 손을 뻗는 것이 먼저다. 당신이 흥미를 느끼고 「칵테일, 러브, 좀비」를 선택할 수 있도록 수록된 단편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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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채원의 목에는 17년째 가시가 걸려 있다. 어리던 그녀에게 어른들은 생선 살점을 들이밀었고, 강요를 이기지 못하고 삼켰다가 병원에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의문의 통증을 얻게 됐다. 결국 트라우마가 생겨서 회는 입에도 대지 않는데, 그녀의 남자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횟집으로 부른다. 내 친구들이 너를 보고 싶어 한다면서.

 

사실 남자 친구인 정현은 자주 가스라이팅을 했다. 너는 다리에 비해 허리가 좀 긴 것 같으니 단점을 커버할 수 있게 스타일을 바꿔보라는 말이 시작이었다. 주로 좋은 말을 먼저 건네며 이전의 차림을 깎아내렸다. 채원은 칭찬에 기분이 좋다가도 돌아서면 찝찝한 기분이 남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눈치를 보게 됐다. 그럴 때마다 가시가 목구멍을 찔렀다.

 

그러던 어느 날, 채원은 자리를 비운 정현의 핸드폰을 보다가


 

나야 잘 지내지. 그런데 네 여자친구 말이야 - 태주 (19p)

 

 

중성적인 이름을 가진 누군가에게 온 문자를 발견한다. 같이 있는 내내 말없이 핸드폰만 보던 정현의 모습이 머릿속을 맴돌며 혼란에 빠진다.

 

해당 단편에서는 평범하게 지내던 사람이 가스라이팅에 잠식되어 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나는 가스라이팅 같은 거 당하지 않을 자신 있어'라며 오만하게 굴었던 과거를 반성하게 되는 내용이었다. 가해자의 화법은 아주 교묘해서, 채원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화를 낼 타이밍을 잡기가 어렵다.

 

또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시'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며 피해자가 느끼는 답답함을 증폭시켰다. 그리고 지루해지기 전에 '태주'라는 의문스러운 인물을 등장시키며 극의 긴장감을 유지했다. 전체적으로 아주 잘 짜여진 스릴러 장르의 독립영화 같은 느낌이었다.

 

 

 

습지의 사랑


 

하천에 빠져 죽은 물귀신은 매일이 지루하다. 물장구를 치는 이들의 발목을 잡아끄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는데, 소문이 나고 나서는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소나무 너머의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다. 그 애의 체구는 작았고 얼굴은 언젠가 낚시꾼이 먹던 빵처럼 희었다. 그리고 다 낡아 해진 교복 같은 걸 입고 있었다. 나무판자를 밟고 삐걱거리며 다가온 '이영'은 반갑게 인사하며 웃음 지었다. 외롭던 물귀신에게 친구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멀리서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물속으로 들어올 수 없는 '이영'은 매번 판자의 끝에 섰다. 그래서 물귀신은 비 오는 날을 기다렸다. 폭우가 쏟아져 내리면 물귀신도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비가 쏟아져 내린 그날, 판자에 발을 딛고 올라선 물귀신은 항상 마주하던 산책로 표지판의 뒤편을 무심코 바라봤다가 말문이 막힌다.

 

 

이 영 / 1990년 8월 20일생 / 실종 당시 OO고 교복에 노란 명찰. (59p)

 

 

사실 '이영'은 숲에서 살해를 당한 귀신이었다. 그리고 위의 반전은 해당 소설에서 시작일 뿐이다. 이후로 사건들이 몰아치며 귀신들의 사랑이 애틋하게 느껴진다. 건조한 사랑은 흔하지만, 이렇게 습하면서도 풋풋한 사랑은 희귀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소중했던 단편이었다.

 

 

 

칵테일, 러브, 좀비


 

가부장적이던 아빠가 좀비가 됐다. 여느 때처럼 퇴근 후 직장 동료들과 술을 마셨던 주연의 아빠는 좀비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원인은 뱀술이었다. 엄마와 주연은 정부가 조치 방안을 마련할 때까지 아빠를 데리고 있으려고 하지만, 아빠는 이성을 잃고 엄마를 먹이로 삼으려고 든다.


 

"안 되겠어. 묶어 둬야 해. 어쨌든 저건 우리가 알던 아빠가 아니잖아, 엄마. 언제 다시 공격할지 몰라. 좀비에게 물리면 대부분 좀비가 된다고. 엄마도 '월드 워 Z' 봤지?" (82p)

 

 

좀비가 되고도 생전의 생활 패턴을 반복하는 아빠. 매일 아침, 저녁 밥때가 되면 식탁 앞에 앉아 먹지도 못하는 음식을 내놓으라며 시위를 한다. 주연은 고집불통이고 가부장적이던 아빠를 미워하지도, 그렇다고 사랑하지도 못하며 이별을 준비한다.

 

좀비가 등장해도 출근한다는 사실이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좀비를 처리해주는 Z 장의사라는 새로운 직업이 등장한다는 점도 유머러스했다. 좀비 사태를 완벽하게 '한국 패치' 시킨 블랙코미디였다.

 

그리고 특히나 인상 깊었던 문장이 있는데 '아빠가 가족여행 가서 사 온 코끼리 목상을 던졌다'는 부분이다. 심히 가부장적인 가정의 양면성을 단 한 번에 요약하는 내용이었다. 남편이 아내에게 목상을 던질 정도로 파탄 난 가정이라도 가족여행을 간다든가 하는 화목한 순간이 존재한다는 점이 묘하게 다가왔다.

 

 

 

한 손으로 움켜쥐는 블랙코미디


 

「칵테일, 러브, 좀비」는 굉장히 작은 사이즈의 책이다. 165 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짧은 만큼 파격적이다. 잔잔한 일상에서 자극적인 컨텐츠를 원한다면 어둡고 축축한 단편들이 담긴 해당 도서를 추천한다.

 

심지어 당신이 여성이라면, 이 책을 더욱 추천하고 싶다. 여성들이 주로 맞닥뜨리는 가부장제나 가스라이팅을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조예은 작가는 사회에서 홀대당하는 여성들의 감정을 물 위로 끌어 올렸다. 깊은 곳에서부터 건져 올려진 책을 읽으며 당신은 공감할 수도, 혹은 위로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컬쳐리스트 이지연.jpg

 

 

[이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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