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끝을 마주하기: 토로(吐露)

글 입력 2024.09.05 14:3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머지않아 너는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이고,

머지않아 모두가 너를 잊게 될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中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이것은 나의 20대를 괴롭게 만든, 하지만 가장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게 해준 물음이다. 스무 살이 된 순간부터 나의 시계는 멈춰버렸다. 미성년자를 지나며 마주한 변화들에 잘 적응한다고 착각하고 살았다.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일기장을 되돌아보며 성장하기 위해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들을 지금껏 모두 묻어두고 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문제를 한 단어로 정리하면 '끝'이다.


인생에 마침표를 찍는 일. 삶이 끝나는 날에만 쓰는 말인 줄 알았다. '나의 삶을 잘 살아냈구나' 깊고 두꺼운 마침표를 편안히 찍고 이생을 마무리하는 것이 자연스레 생각한 '끝'이었다. 하루에도, 한 달에도, 한 해에도 수많은 마침표를 찍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성장이 멈춘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생각해 보면 어리석었다. 매년, 매 학기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면서 '끝'을 떠올리지 못했다니 말이다.


'끝'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각자의 단어 사전에서 의미하는 바가 다를 수도 있다. 나에겐 하나의 열린 문을 닫는 것이다. 시작한 일에 끝매듭을 짓고 다음 일로 넘어갈 준비를 할 수 있는, 이성적으로 그 일을 하던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뻔하지만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방식인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끝'은 명사로 4가지의 의미가 존재한다. (네이버 국어사전 참고)

 

 

① 시간, 공간, 사물 따위에서 마지막 한계가 되는 곳.

예문) 시작과 끝.

② 긴 물건에서 가느다란 쪽의 맨 마지막 부분.

예문) 끝이 무디다.

③ 순서의 마지막.

예문) 그가 끝으로 도착하였다.

④ 행동이나 일이 있은 다음의 결과.

예문) 산고 끝에 옥동자를 낳다.

 

 

이 글에서 사용한 '끝'은 ①과 ④에 가깝다. 스무 살 이후 발생한 변화 중 가장 극적인 예가 많았던 작년 7월부터 올해 7월까지 나는 '끝'내지 못한 일들의 무게와 부피에 밀려 일상을 영위하는 데에 한계를 맞이했다. 그 '끝'은 다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았다. 나는 다음을 마주하기 두려운 겁쟁이가 되었고, 사람을 만나기 두려워 혼자이길 선택했고, 점점 스스로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글과 말을 통해 나의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낯설어졌고, 보통 사람처럼 연기할 수 있는 영상과 사진을 통해 이미지로만 소통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이야기를 출력하는 시스템이 무너진 상태에서 영화 - 책도 읽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영상 매체에 의존했다 - 를 통해 이야기 입력만 반복했다. 그렇게 올해 초부터 8월까지 53개의 영화와 25개의 시리즈와 11권의 책을 보았다.

 

나는 감히 그 시간이 문화 향유였다고 말할 수 없다. 교수님의 강의를 듣기만 하고 해당 내용을 학습했다고 말할 수 없듯이 나는 그저 '보았다'. 시청이나 독서라는 단어를 붙일 수 없는 단순한 시각적 자극이었다. 글을 쓰던 사람이었는데 긴 시간 동안 어떤 결과물도 내놓지 못했다. 그렇게 수십 개의 문화 예술을 접하면서 내가 작성한 - 글이라고 말하기 부끄럽지 않은 - 것은 0이다.



disney-252816_1280.jpg



나를 이렇게까지 만든 '끝'은 작년에 맞이한 기쁨과 설렘의 '시작'에서 비롯된다. 6월 마지막 날 난생처음 홀로 14시간 비행으로 떠난 미국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수업 시스템, 일 시스템, 생활 환경을 마주했다. 한정적인 시간 동안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 미국 여행, 캐나다 여행, 놀이공원 즐기기, 자유로운 소비, 친구들과 이웃 주민인 삶 - 것들을 누릴 수 있는 상황에 빠르게 적응해야 했고 그 생활은 무려 작년 7월부터 올해 2월까지 이어졌다.


매일 도파민 가득한 하루로 행복했다. 아니 행복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도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운 꿈같은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들을 누리는 놀라운 기회의 시간이 한정적이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했다는 것이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으로 충전이 필요한 사람인데 그럴 시간도 마련하지 못한 채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 총량을 초과한 일상의 연속은 지독한 방전의 결과를 낳았다.

 

미국을 떠나기 한 달 전쯤부터 난 생각의 회로가 고장 난 사람처럼 어리석어졌고,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갈 친구들에게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다. 미안함과 아쉬움을 남긴 채 돌아와, 가족을 제외한 누구도 만나지 못하고 한국에 온 한 달 동안 거의 집에만 있었다. 사고가 멈춘 것 같았고, 가끔은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렵게 느껴졌다. 그렇게 미국에서의 생활을 잘 끝내야 하는 황금 시기를 간신히 사는 데 사용했다.


새로운 경험이었던 만큼 부딪히며 배운 것들이 많았다. 지나간 시간을 마주해야 했다. 뒤돌아 유심히 보았을 때 즐겁고 괴로웠던 모든 순간에서 무엇을 잘 해냈고 무엇이 아쉬웠는지 복기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을 미뤘다. 에너지가 없다는 이유로, 너무 즐거워서 혹은 괴로워서, 다시 생각하면서 그리워지고 다시 떠올리는 것이 두렵다는 이유로 '끝'을 미루고 일상을 멈추고 성장의 문을 열지 않았다. 문제를 스스로 문제로 인식하기를 거부하며 회피하며 매일 어제와 달라지고 싶은 오늘을 살았다.

 


water-3378639_1280.jpg

 

 

처음 숨을 쉬고 하루를 되찾은 계기는 나에게 보통 사람 같은 일상이 생겼던 4월이다. 집에만 있던 나에게 친구는 규칙적인 나날을 만들어줄 일을 제안했고, 낯선 일이라 두려웠지만 시작했다. 매일 오전 일찍 기상해야 했고 일상이 돌아오는 듯했다. 그러나 하루의 시작만 달라졌을 뿐 나의 무력함은 그대로였다.

 

일은 3개월이 되기 전에 끝났고 이번 끝은 어렵지 않았다. 이때 내가 어려워하는 끝의 핵심은 관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하는 시간 동안 나에게 관계는 일을 소개해 준 인생의 반을 알고 지낸 한 친구뿐이었다.


다음 계기도 금방 찾아왔다.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환경에서 관계를 맺는 상황에 다시 나를 던진 것이다. 한 달 반 동안 나는 오랜만에 피아노를 매일 연습하고, 난생처음 베트남어를 배우며 하나의 목표를 향해 사람들과 열심히 살았다.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며 새로 친구를 사귀었다. 많은 기록과 사진을 남기고 우리의 공식적 일정은 8월 말에 끝이 났다.

 

올해 여름을 보낸 3개월 여정의 끝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왜 올해는 작년과 다른지 생각했다. 명확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무엇이 달랐는지 생각하며 내가 작년을 마무리하지 못한 부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관계와 기록이다. 좋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과의 정서적 유대를 어떻게 이어가고 있는지, 머릿속이 아닌 실제 기록물을 통해 추억하고 있는지가 달랐다. 나는 끝이라는 '현실'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안녕 고마웠어

짧았던 너와 나의 계절

끝은 또 하나의 시작

 

행운을 빌어요(2012) - 페퍼톤스

 

 

나는 작년에 만난 다양한 나라의 외국 친구들과 연락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은 생생한 현실이었지만,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약속된 헤어짐의 날이 찾아오는 것 또한 수용해야 하는 현실이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후, 긴 시간 즐거움을 공유했던 만큼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마치 지금의 관계를 그대로 얼리고 싶은 듯 나는 대화를 끝맺지 못하고 답장을 미루었다.

 

생각해 보니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다.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을 거부하며 나만 시간이 지나도 같은 곳에 머무르는 선택을 했다. 친구들과 헤어진 지 6개월이 지났는데, 우리의 주변 환경은 그사이 달라졌는데 관계에 변화가 생기는 자연스러움을 거부하는 건 바보 같은 행동이다. 그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작년에 찍은 사진들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지 않다. 한국에 돌아와 다시 적응하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익숙한 집과 동네 풍경이 눈에 편해질수록 사진첩 속 사진들이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내가 반년 동안 살았던 집은 좋은 꿈에서 보았던 곳 같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있는 그때의 나에게 부러움도 느꼈다.


그 사진들을 한국에서 만난 친구들이 궁금해할 때가 아니면 잘 꺼내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었다. 그날들은 나에게 익숙한 삶에서 툭- 떨어트려 가상으로 만든 행복한 스노볼 세상 같았다. 볼수록 더 그곳으로 가고 싶어지고 현재 내 앞에 놓인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하루, 일주일, 몇 달의 시간 동안 핸드폰에 잔뜩 담아온 지난 7개월의 시간을 눈에 잘 보이는 곳으로 꺼내지 않고 계속 지금까지 묵혀두었다.



gymnast-1579148_1280.jpg

 

 

무더웠던 열기가 식는 9월이다. 사람들은 산뜻해진 밤 날씨에 새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나도 비로소 다시 시작하기 위해 SNS에 쌓인 외국 친구들의 연락을 확인하고, 사진을 옮겨 담을 이동식 메모리를 준비한다. 7개월의 시차를 깨면서 마주한 현실 속 친구들은 반가우면서 낯선 모습이다. 그사이 더 멋있어졌다. 사진첩 속 영상이 컴퓨터로 옮겨갈수록 꽉 찼던 핸드폰 용량에 틈이 생기고 내 마음의 여유도 커진다.


숨이 쉬어진다. 쌓인 연락들과 가득 채운 핸드폰 메모리가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나 보다. 좋은 시작에 걸맞은 끝을 맺을 용기를 지금껏 가로막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올해 봄부터 나를 결박한 끝내지 못한 마음, 각자의 생활로 돌아온 현실을 마주하지 못하던 마음은 같은 시간대에 여전히 존재하는 친구에게 온 연락과 함께였던 사진을 마주하며 비로소 정리되기 시작했다.

 

 

짧지 않은 나와의 기억들이

조금은 당신을 웃게 하는지

삶의 어느 지점에 우리가 함께였음이

여전히 자랑이 되는지

 

에필로그(2021) - 아이유

 

 

나는 끝이 여전히 두렵다. 끝이라고 말한 순간 한때 몹시 소중했던 사람, 시간, 공간에 담긴 가치가 한순간 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형체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시작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끝에 언제쯤 익숙해질지 모르겠다. 끝을 이야기하며, 안녕을 고하며 그 말에 눈물 없이 상대에게 담담히 전할 수 있는 때가 내가 겨우 어른이 되는 순간이 아닐까 기대한다. 그런 어른이 되는 날을 늘 염원하고 있다.

 

밝은 이별 노래의 삶을 생각해 봤다. 시작과 끝,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는 앞으로의 인생에서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기쁘게 작별을 고하는 삶을 원한다. 끝은 슬픔을 부르는 일이 아니다. 나를 되돌아보고 그 성장의 경험을 발 디딤으로 여기며 나아갈 힘을 준다. 편안한 숨을 내쉬게 한다.

 

이제 미래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다시 일상으로 담담히 걸어 나간다. 또 다른 끝을 마주하러 간다. 마지막으로 지금이 올 때까지 어리석고 나약한 나를 기다려준 배울 점이 많은 멋진 내 사람들 - 이 글을 끝까지 읽어나간 당신을 포함한다 - 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싶다.

 

 

[정서영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9.1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