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인간 뫼르소 - 연극 이방인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글 입력 2024.09.04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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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 첫 대사를 듣자마자 나는 알았다. 그는 내가 줄곧 가슴 안에 간직해 온 뫼르소가 아니라는 것을. 암전으로부터 차차 밝아오는 무대 위, 쨍하게 드러난 배우의 눈빛과 첫 대사를 싣고 흘러나오는 목소리 속에서 인물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감정을 캐치한다. 감정, 외재적 자극에 대한 내재적 반응, 인간적이고도 당연한 것. 무대 위로 슬며시 흘러나 버린 그것은 미세한 편린에 불과했으나, 내가 기억하고 있는 서사의 맥을 얼마든지 뒤바꿔버릴 수 있음을 생각했다. 원전을 꽤나 인상 깊게 읽은 탓이다.

  

어디까지나 소설의 구절을 따라 내 심상 속에 그려진 뫼르소와 다른 것일 뿐이라마는, 우리의 해석은 첫 장면에서부터 작별했음을 느끼며, 극으로 걸어 들어간다. 배우의 목소리는 퍽 빨랐고 눈빛에는 이채가 돌았으며, 퇴색하려 애쓴 흔적들이 물씬 풍기는 감정선과 부러 내리깔아둔 목소리는 일견 무심하고도 배타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듯했다, 마치 꾹 다문 입술처럼. 그건 원작의 뫼르소와는 다른 인물을 그려낸다. 소설이 묘사한 캐릭터가 마치 전두엽을 제거당한 사람처럼 감정 일체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연극이 형상화해낸 캐릭터는 매우 무심하고 수동적이며 어딘가 이기적인 사람처럼 보인다. 조용하고도 지극히 개인주의적일 것만 같은. 감정적 반응이 적기에 무심할 수는 있겠으나, 여전히 무언가를 느끼고 또 느낄 수 있는 사람.

  

그건 배우와 연출의 의도인지, 아니면 예기치 않은 결과물인지를 나는 아직 모른다. 허나 내 기억 속의 뫼르소와 달리, 무대 위에 서 있는 그는 인간이었다. 사람 사이의 존재, 우리 주변에 서식하며 무뚝뚝하나마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람들과 교류해 나가는 평범한 존재 말이다. 굳이 따지면 ‘T’형 인간이라고 해두어 볼까. 드물긴 하지만, 저 캐릭터와 닮은 사람 몇 명쯤은 내 기억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말수가 적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으며, 백이면 백 공감할 법한 사안에 있어 쉽사리 공감하지 못하는, 감정 반응이 미약한 사람. 하지만 미약함과 부재함 사이에는 0과 1만큼의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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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소설의 처음을 여는 이 구절은 본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상징이다. ‘이방인’이란 공감 능력이 부재해 인간 집단으로부터 배척된 존재. 소설 ‘이방인’은 사고 판단과 같은 이성적 능력만이 기능하고 감정적 반응이 일절 결여된 인간,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배척되어 가는지를 탁월하게 묘사한다. 어머니의 죽음과 그에 대한 뫼르소의 반응은 이 ‘결여’를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상징. 그는 어떤 사건에서도 감정적 반응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극단적 예시를 통해, 소설은 초장부터 드러내고 못 박는 것이다.

  

그는 자기 안의 욕망만을 느낄 뿐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로, 어떤 사건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보편적인 내적 반응을 느끼지 못하고,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처한 감정적 상황에 있어서도 적절한 행위를 도출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의 존재는 인간 사회 속의 이방인으로서 규정된다. 인간이 다른 인간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한 우리는 상호 관계하고, 그 교류는 감정적 반응의 교환인 공감 행위를 통해 자연적으로 수행되기 때문에. 소설은 뫼르소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그 사회 속에서 오롯이 개인적이고 고유하게만 존재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고, 그에 대해 “불가하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본 작품은 뫼르소의 ‘결여’를 독자에게 설득시키는 데에 꽤 긴 분량을 할애한다. ‘공감 능력의 결여’가 작품의 핵심 갈등과 주제의식을 도출하기 때문에, 그 캐릭터를 어떻게 그려내어 독자를 설득시키는지가 작품의 설득력을 좌우한다. 아무래도 주변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인간상이 아니므로 작품은 순전히 독자의 상상력을 빌어 인물 이해를 도출해야 하는데, 그 과정엔 필히 정교함이 수반된다. 이 인물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하는 모종의 규칙과 인과를 설정하고, 그 설정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정말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이 처한 부조리함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느껴서는 안 된다’와 같은 규칙과 인과가 설정되고, 그것을 서사의 모든 부분에서 철저히 수행하는 정교함이 필요하다. 그래서 본 극의 인물 묘사는 까다롭다. 감정 반응의 미약함과 부재함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존재하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연극이 형상화한 것은 ‘인간 뫼르소’이다. 그는 표백된 덤덤함을 가장하고 있으나, 그의 몸짓 구석구석에서 감정의 흔적들이 읽힌다. 그는 말이 빠르고 많으며, 짐짓 무상하여 여유롭다기보다는 어딘가 조급함이 어리어 있고, 대개 무심한듯하나 이따금 시니컬하게 행동한다. 행동 원리에서 일관된 정합성이 느껴지는 소설적 인물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아, 더없이 인간적이다. 객석에 앉아서, 기억 속의 그와 작별을 고한 나는 인간 뫼르소를 구경한다. 내 기억 속에 간직된 과묵하고 무덤덤한 뭇 인간의 전형을 그 위에 덧씌워본다. 그러자 뫼르소는 더 이상 서역 만 리 소설 속 허구의 존재가 아닌, 지상의 존재로 탈바꿈되었다.

  

다만 그 행간을 이해하기에는 더 많은 상상력이 소요된다. 연극이 다 말하지 못한 것들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므로. 예를 들자면 여전히 ‘인간적’인 존재에게, 미약하나마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 저 존재에 있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함은 어떻게 납득될 수 있는 것인가. 아, 어쩌면 소설의 시간대 바깥에선 어머니와 그의 관계 서사란 그토록 지겨우면서도 마지막 애틋함만을 남겨둔 까닭일지도 모르지. 마리가 뱉은 결혼에의 질문에 있어서는, 왜인지 그가 담담한 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답하기 곤란한 것을 꺼리는 듯하나, 오히려 당당하려 애쓰는 듯한. 그건 어쩌면 정말로 그가 미약하게나마 마리에 애정을 느꼈으나, 그것이 자랑스레 표출되기에는 여전히 미약하였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

 

절정부 클라이맥스, ‘사제’와의 대화에서 일전 행태에 비하자면 과도하고 일차원적인 수준의 분노를 폭발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아, 어쩌면 그의 안에도 감정이랄 게 있어, 오래도록 쌓여왔던 까닭일지도 모르지. 그는 정말로 신중하고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었을지도. 원작에서도 ‘사제’와의 갈등에서 뫼르소는 분노를 표출한다. 허나 소설에 따르면, 그의 유례 없는 감정 분출은 신을 위한다는 허명과 위선으로 점철된 사제의 기도 앞에 자기 자신의 일관성과 정합성을 피력하고자 하는 의도로부터 발단된다. 그에 비하자면 본 극의 해석은 일방적 분노 표출에 가까웠다. 이방인으로서, 인간이라는 타자적 세계의 허명에 대한 규탄과 절규에 가까운 순도 높은 불만을 폭발시킨다. “뭐가 선하냐고, 뭐가 옳은 거냐고!” 마치 부조리했던 자신의 재판에 대한 감정적 복수 같은. 뭐, 결과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긴 분량의 소설을 연극이라는 긴 호흡의 장르로 탈바꿈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존재한다. 소설의 장대한 텍스트, 더군다나 보편 정서에 기대어 많은 것을 전제로 떠넘길 수 있는 여타 장르의 그것과는 달리, 전부 설명하고 보여주어 설득시켜야 하는 한에는 그 대사의 길이 자체가 무감각한 뫼르소의 성격 묘사에 장애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여전히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채 간략하게 ‘소개’된 것들이 많았고, 그 간극을 마주할 때마다 소설에의 기억을 빌어와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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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를 향한 포효 이후에, 극은 어김없이 엔딩 시퀀스로 접어든다. 내 그토록 애정했던 마지막 문장을 향하여. 사제는 돌아갔고, 내일은 광장에서 그의 처형식이 있을 예정이다.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그들, 공감하는 인간들, 동시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에는 한없이 배타적인 그 인간들, 언쟁에 지친 나머지 뫼르소는 차가운 교도소의 바닥에 누워 차창 밖을 바라본다. 거기 별이 있었고,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들려온다. 한때 한없이 가까이 있었던 세상, 그리고 지금 이렇게나 조용하고도 평화로운 세상, 알게 모르게 줄곧 자신을 가만 지켜보아 왔던, 아무것도 기대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 세계가 저기에 있었음을 깨달으며, 그는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눈을 뜬다.

  

그리고 말한다. 비장하게, 장엄하게, 복수하듯이. 오 나는 안타까웠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끼도록. 내 남은 소원은 다만, 내 처형의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암전.’ 그의 처형이 그가 내내 지켜온 일관됨, 공포가 우리로 하여금 쉽사리 포기하게 만들곤 하였던, 바로 그 관철의 미학을 완성시켜줄까. 이제 객석을 떠나며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글쎄, 그렇긴 하겠지.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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