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슴슴담백한 날들

글 입력 2024.09.04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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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수 있는 만큼을 최대한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나는 언제나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혹자는 어떤 대상에 이렇게나 열성적일 수 있다는 것이 부러울 정도라고도 했다. 그 정도로 무언가에 흠뻑 빠져들었을 때의 고양감이란... 말로 온전히 표현하기 어렵다. 작은 것에도 마음이 요동쳐서 도무지 지루함이란 걸 느낄 새가 없다. 눈 앞에 쌓인 과업들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기 싫은 마음까지야 어쩔 수 없지만, 이것들을 얼른 해치우고 나면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존재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힘이 절로 났다.


평생이란 말을 쓰기엔 아직 조금 우스운 나이지만, 내 평생의 일과 운용 방식이 정말 그랬다. 해야 하는 일들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남은 시간과 체력은 모조리 좋아하는 것들에 쏟아붓기.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서 하루 종일을 서 있고, 평생 가본 적도 없는 지역을 찾아가서 밤을 샜다. 천 번이 넘도록 같은 노래를 듣는가 하면, 영화 하나를 보고 몇날 며칠을 떠들기도 했다. 그래도 힘든 줄을 몰랐다. 과장 조금 보태자면, 마르지 않는 애정의 샘이 매일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한 대상이 질리면 다음 대상으로, 그게 질리면 또 다음 대상으로. 여기저기 문어발처럼 뻗쳐 놓은 흥미거리들이 24시간 달려 있는 모빌마냥 내 마음 앞에서 흔들거렸다.


그런데 최근 한동안은 꽤 위기였다. 매일매일 재미가 없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안정을 넘어선 완전무감의 상태. 간만에 이 공간에 썼던 예전 글들을 조금 톺아봤는데, 말할 것이 너무 많아서 쏟아내듯 써놓은 문장들이 낯설었다. 마음에 산더미처럼 쌓인 감상을 그런 식으로 풀어내는 일을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영 기력이 없다. 하나하나 설명하고 설득하기가 버겁다. 척 하면 척일 정도로, 나와 비슷한 감상을 가진 사람들과 어떤 벅참의 덩어리를 공유하고 공감받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느낌이다.

 

무언가 써보려고 하면 힘부터 빠졌다. 사실 단순히 글이라는 문어발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건 결국 느끼는 게 없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어떤 것을 봐도 감상이 미묘했다. 뭐든 새로운 것을 접했을 때, 나를 이루던 세상이 깨어지고 또 밝아지는 감각이 그리웠다. 콘서트, 뮤지컬, 연극, 전시, 책, 영화, 음악. 자극이 될 수 있는 건 나름대로 계속 찾아서 접했는데 여전히 재미는 없었다. 좋아도 그렇게 좋지 않고 싫어도 그렇게 싫지 않았다. 좋은 건 왜 좋은지, 싫은 건 왜 싫은지 하나하나 따져보던 나는 온데간데 없고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하는 맹숭한 나만 남아있었다.

 

결국 올초에 했던 걱정이 정말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듯해서 두려웠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역량 자체가 줄어버린 건 아닐까. 어딘가 빈 듯한 감상의 나머지 부분을 채우는 건 대부분 기시감이나 피로감이었다. 이런 변화는 그저 내가 지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지금의 나를 직면하는 일을 계속 미뤄왔는데, 이쯤 되니 이젠 정말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것도 같다. 마음에 나이를 먹었다. 이제는 완전히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애정과 재미를 느낄 수는 없다. 감정에도 에너지가 필요하고, 저전력 모드가 아니면 지금 내게 쌓인 과업들을 온전히 처리해낼 수도 없다. 씁쓸한 일이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 삼는 것은, 지금이 일종의 과도기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야, 앞으로 느낄 것이 권태밖에 없다기엔 아직 나는 너무 어리고 또 모르는 것이 많다. 이 지루함은 결국 내 무지몽매함의 또 다른 표현형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독해법을 아직 찾지 못했을 뿐, 또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 앞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 그 기대를 붙잡고 스스로 마음을 계속 두드리고 있다. 언젠가는 이 두드림에 응답받을 수 있을까. 즐거움의 새로운 페이즈를 계속 그려볼 뿐이다.

 

 

[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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