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세 번째 만난 이방인, 무의미한 해석 - 이방인

글 입력 2024.09.05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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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2022년부터 1년에 한 번씩 비슷한 시기에 <이방인>을 접하게 되었다. <시시포스 신화>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아 알베르 카뮈의 팬을 자처하면서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 <이방인>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읽었을 땐 뫼르소가 마냥 무기력하게 부조리에 순응한 인간처럼 보였고, 두 번째 읽었을 땐 뜨거운 태양 아래 지독하리만치 거짓말을 안 하는 순수한 영혼처럼 보였다. 세 번째는 책이 아닌 연극이었다. 활자로만 존재했던 뫼르소가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걸 보며 어쩌면 그에게도 부조리에 순응하지 않았던 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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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엄마의 장례식에서도 무심한 태도를 일관하는 ‘뫼르소’를 주변 사람들은 이상하게 본다. 장례식 이후 ‘마리’라는 여자친구를 사귀고, 건달인 이웃 ‘레이몽’과 어울리게 된 뫼르소는 레이몽의 치정 싸움에 휘말려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연극으로 보는 이방인


 

연극 <이방인>은 알베르 카뮈가 1942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소설일 때 가장 적합해 보이는 이 텍스트가 연극으로 어떻게 만들어질까 궁금한 마음에 산울림 소극장으로 향했다. 연극 <이방인>은 화자의 내면 서술이 많은 원작의 특징을 살려 주인공의 독백에 큰 비중을 두었다. <이방인>의 유명한 첫 문장.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가 나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다만 지나치게 독백이 많으면 원작과의 차별점이 없는 각색이 되는 거 아닐까 우려되기도 했다. 다행히 적절한 빈도와 차례에 독백이 나와서 연극의 현장감을 느끼면서 뫼르소의 내면도 착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연극 무대는 아주 단조로웠다. 화려한 세트 없이 간단한 무대 장치만으로 해변, 집, 장례식, 법정 등 다양한 배경을 효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방인>이 워낙 뫼르소의 내면에 집중하는 이야기라서 단조로운 무대가 군더더기 없이 독백과 대사에만 몰입할 수 있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무대를 둘러싼 원형의 난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인물들이 난간 위를 걸으며 중요한 대사를 읊을 때 위에서 올려다보며 압도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연극에선 주인공 뫼르소 빼곤 모든 배우가 최소 1인 2역을 소화했다. 역할마다 전혀 다른 모습에 같은 배우가 맞나 의심할 정도였다. 배우가 역할 전환을 제대로 못 이루면 몰입이 깨지기 쉬울 텐데 이 극에선 배우들의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를 더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원작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내용적인 측면에선 원작을 충실하게 따르고, 무대 연출로 특색을 더한 방식이 만족스러웠다.

 

 

 

부조리의 뻘밭에서 뒹구는 인간


 

카뮈를 대표하는 단어는 단연 ‘부조리’다. 명확함을 갈구하는 인간의 욕망과 수수께끼 변수로만 가득한 세상 사이에 빚어지는 마찰. 이것을 카뮈는 부조리라고 불렀다.

 

보통 사람들은 부조리에 저항한다. 세상의 만연한 혼돈에 반발심을 드러내고 어떻게든 질서를 개편하고자 한다. 반면에 뫼르소는 모든 부조리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엄마의 죽음, 개 혹은 연인을 학대하는 이웃들, 사랑을 나눈 마리, 승진의 기회 앞에서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이지 않고 그저 남들이 이끄는 흐름대로 따라가기만 한다.

 

<이방인>만으로 카뮈를 접하면 카뮈가 한없이 냉소적이기만 하다고 오해하기 쉽다. 카뮈의 부조리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시시포스 신화>, <반항하는 인간>까지 읽다 보면 그가 얼마나 낭만적이고 희망을 가득 품은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카뮈는 부조리를 인지하고, 삶의 무의미함을 받아들이면서도 이에 반항하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이를, 구원에 호소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이를 높이 평가했다.

 

처음 <이방인>을 읽었을 땐 카뮈가 이후에 중요한 가치로 내세운 ‘반항’과 전혀 다른 뫼르소를 비판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같은 텍스트를 거듭 접하다 보니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그를 마냥 비난하고 싶지 않아졌다. 카뮈 역시 뫼르소의 가장 큰 특징을 ‘무기력’이나 ‘권태’가 아닌 ‘솔직함’으로 꼽았다. 누구에게나 삶은 부조리하지만, 모두 외면하고 자신이 세운 의미가 정답이라고 믿는다. 이를 제대로 직시한 이는 뫼르소밖에 없다.

 

뫼르소의 부조리한 태도는 여러 종류다. 먼저 역할의 부조리가 있다. 요양원에 어머님을 보내고 자주 찾아가지도 않으며, 엄마의 시체를 확인하지도 않고 그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그는 아들로서 예의에 어긋난 모습을 보인다. 그는 법정에서도 피고인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다. 어떻게든 형량을 덜 받게끔 변호사의 말을 따라 전략적으로 말하는 게 중요한 법정에서 그는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진술로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곤궁에 빠트린다. (물론 법정 역시 뫼르소의 살인이 아닌 사생활에 집중하는 등 본질을 잃어버린 부조리한 형태를 띤다)

 

또, 선악의 부조리가 있다. 개를 학대하는 이웃과 연인을 학대하는 이웃 모두 보편적으로 악인으로 여겨질 인물이지만, 뫼르소는 어떠한 가치판단도 내리지 않고 순전히 호기심만으로 그들을 대한다. 미래의 부조리가 있다. 파리 지사에서 근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도, 마리가 결혼을 얘기해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그에게 더 나은 미래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을 통과하는 그는 오로지 현재만 인지할 뿐이다.

 

그런데 연극으로 <이방인>을 보니 부조리 그 자체인 뫼르소가 달라 보였다. 텍스트로만 뫼르소를 접했을 땐 그가 태생적으로 무기력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마주하니 한때 열정을 품었으나 잃어버린 사람으로 보였다. 원작 내용을 충실히 재현했는데도 이렇게 달리 보일 수 있다니 신기했다.

 

<이방인>이라는 콘텐츠 자체를 접하고 처음으로 이런 의문을 가졌다. 뫼르소는 정말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꿈도 목적도 없는 삶을 살았을까? 부조리에 저항하다가 좌절을 경험하고 힘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소설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을 ‘한때 꿈이 있었죠’라는 대사가 유난히 묵직하게 들렸다.

 

배우의 연기 노선이 그런 건지, 연출의 방향이 그런 건지, 나의 가치관이 달라져서인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연극 <이방인>은 감히 내가 안다고 확신했던 원작에 대해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어쩌면 뫼르소는 이방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날 연극에서 뫼르소는 사회가 주입한 정답을 믿었으나 이에 배신당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현대인들과 닮아 보였다.

 

 

 

궁극의 부조리, 죽음


 

삶에 정해진 의미란 없고, 세상엔 어떠한 질서도 없다. 기회는 불공평하며 누구나 살면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결과를 맞닥뜨린다. 그런 세상 속에서도 유일하게 절대적인 규칙이 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작품의 표현을 따르면 우리 모두 사형선고를 받은 채 살아가고 있다.

 

뫼르소가 엄마의 죽음에 무감각한 건 그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죽음 자체를 비극으로 여기지 않아서다. 삶에서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그가 그 끝을 슬퍼할 리가 없다. 뫼르소에게 엄마의 죽음은 그저 어느날 일어난 커다란 변화일 뿐이다.

 

그런 그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다. 그가 살고자 했다면 햇빛 때문에 총을 쐈다고 진술하진 않았을 것이다. 판사의 말대로 법정에 뫼르소 같은 피고인은 없다. 그러나 사형이 확정되고 무기력하게 집행만 기다리는 동안, 그는 원래의 무기력한 태도를 잃어버리고 극도로 절망하기 시작한다. 이런 그에게 신의 뜻을 전하려는 신부가 계속해서 만남을 시도하지만, 뫼르소에게 더 큰 분노만 심어줄 뿐이다.

 

결국 예정대로 사형은 집행되고, 그는 죽음 직전에서야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을 느낀다. 소설에서 화자 뫼르소는 내내 건조하고 차가운 태도를 일관하는데, 그래서 온화한 느낌의 결말 부분이 굉장히 기묘하게 느껴졌다.

 

연극으로 <이방인>의 마지막을 접하니 그다지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야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이는 모든 이가 겪는(혹은 겪을) 궁극의 부조리다.

 

뫼르소가 진정으로 부조리를 받아들였다면 그렇게까지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세상의 부조리를 어떤 ‘악의’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격렬하게 세상과 불화한 것이다. 세상은 선의도 없고, 악의도 없다. 세상은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오로지 인간만이 삶에 대한 애정으로 세상을 해석하려 노력할 뿐이다.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부조리가 곧 절망이 아님을, 세상은 자신에게 악의적이지 않았음을, 세상의 따뜻한 무관심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었음을, 그리고 그가 놓아버린 의미를 만들 기회들을 떠올린다.

 

*

 

단정적인 태도로 <이방인>을 해석하는 태도는 무의미하다. 부조리의 권위자 카뮈가 그의 작품이 획일적인 정답을 갖는 걸 원했을 리가 없다. 내가 <이방인>을 접할 때마다 감상이 달라졌던 건 내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 그때그때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 난 부조리한 세상과 삶의 무의미함에 몸서리치면서도 버거운 하루하루를 견디는 나를 대견해하고 있다. 뫼르소의 공허한 눈빛은 관객인 나를 얼마든지 투영할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해주었다. 나는 세 번째 <이방인>을 이렇게 감상했다. 앞으로 또 어떻게 감상할지는 나도 알 수 없다. 애초에 가늠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기도 하고.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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