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가장 멀어짐으로써 가장 가까워지려 한 이방인 - 이방인

글 입력 2024.09.07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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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은 폴 발레리가 뫼르소를 묘사했던 문장인 "가장 적게 말함으로써 가장 많이 말한다"에서 인용함.

 

 

소설 「이방인」을 읽은 건 연극 <이방인>을 관람하기 사흘 전이었다. 원작을 향한 오래된 호기심이 타올라 부랴부랴 책을 꺼내 든 것이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선 두 감정이 바로 떠올랐는데, 하나는 카뮈가 그려내는 세계를 향한 애정과 경외감이고 또 하나는 연극화하기가 굉장히 어려울 것이란 우려였다.


주인공 뫼르소가 모든 것, 무엇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점과 일인칭 시점이 아니면 쉽사리 접속할 수 없는 그의 내면 때문이다. 특히 소설은 이야기의 전개보다는 뫼르소라는 '낯선' 세계관을 묘사하는 데 집중하고, 그럼으로써 타당해지는 세상의 부조리를 향한 고발에 무게를 둔다. 연극은 필연적으로 이야기의 전개를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고 관극 후에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방인」을 소설이 아닌 형식으로 재현한다는 건 필연적인 실패를 감내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이방인을 이해하고 분석하고 구체적인 형상으로 탄생시키려고 노력한 배우, 각본가, 연출가, 스태프가 가장 잘 아는 사실일 것이다. 훌륭한 연기와 무대와 연출과는 별개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이방인의 원전을 소환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연극 <이방인>은 명백한 장르적 제한을 또 다른 독해의 가능성으로 여기며 '저항'했다는 점에서 실패에만 머물렀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2024 이방인_포스터_서브.jpg

 

 


뫼르소는 누구인가


 

관객(혹은 독자)은 이방인이 뫼르소를 가리키는 말이란 걸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로 시작하는 뫼르소의 기이함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담담한 모습에서 더 강렬해진다. 그는 무엇으로부터의 이방인일까. 독자는 자연히 궁금해진다. 이때 뫼르소 이외의 인물들도 어느 정도 이방인의 면모가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뫼르소를 사랑하는 마리, 여자를 때리고 포주 노릇을 하는 레몽, 미쳤다며 온갖 욕을 하면서도 결코 자신의 개와 떨어지지 못하는 살라마르.


사회적인 관습에서 크고 작게 벗어난 이들은 뫼르소처럼 이방인이라 불릴 수 있다. 어느 누구나 그러하듯. 하지만 분명 다른 층위의 벗어남이 뫼르소에게 있다는 걸 관객은 직관적으로 느낀다. 배우의 연기로써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 차이는 바로 뫼르소가 자신의 감정과도 멀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버릇은 그에겐 어떠한 관계나 사건도 무의미하다는 걸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으로 야기되는 모든 감정의 변화로부터도 무관하다는 뜻을 내포한다. 다른 인물들과 달리 그는 어떤 상황이든 기계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먼발치 벗어났다는 사실이 뫼르소를 독자적인 이방인으로 존재하게 한다. 사회와 멀어지면서 스스로와도 멀어진 건지 그 반대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에겐 분명 허무주의적이고 그래서 전복적인 시선이 있다.

 

 

 

허무주의는 어떻게 전복이 되는가


 

문화와 관습으로부터 멀어진 혹은 탈락된 뫼르소에게 이 세계는 정교하게 짜인 역할극에 가깝다. 정치인의 연설에 일정한 형식이 있는 것처럼, 일상의 사소한 대화나 감정마저도 사실은 제한된 틀 안에서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틀은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이념과 문화 등에 의해 만들어진다. 가령 어머니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뫼르소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일꾼이나 너무 슬퍼하지 말라며 위로를 건내는 이웃을 보자. 이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면 당연히 슬플 것이라는 예상으로 행동하고 있는데, 이것은 뫼르소의 실제 감정과는 무관하게 반사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일종의 문화적 각본에 의한 연극으로 볼 수 있다. 이 각본은 반드시 따라야 할 절대적인 당위가 없음에도 따라야만 비난받지 않을 수 있는데, 그 타당성마저 시공간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점에서 허무하다.


세계의 연극성을 인식한 뫼르소는 사실 모든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의 말은 마치 어린아이가 끊임없이 ‘왜’를 묻는 것과 비슷하다. 왜 엄마가 죽었을 때 슬퍼해야 하지. 왜 슬프면 눈물을 흘려야 하지. 왜 엄마가 죽은 다음 날 사랑을 나누면 안 되지. ‘왜’라는 질문은 무한할 수 있지만 ‘타당한’ 대답은 무한할 수 없다.

 

그래서 뫼르소는 어김없이 물을 수 있다. 사랑과 슬픔 따위의 감정이 얼마나 학습적이고 관습적이고 습관적일 수 있는지. 사실 자신이 모든 잡음에서 벗어나 '진정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라면, 설령 그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일지라도 그걸 없다고 할 수 있는지. 없음의 감정도 나의 주체적이고 실존적인 감각이 아닌지. 그것이 존중받지 못하고 비판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 어쩌면 뫼르소는 가장 적게 느낌으로써 가장 많이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유의미한 것은 정욕, 햇빛, 바닷물처럼 직관적인 감각, 즉 연극적인 사고를 거치지 않는 말초적인 감각이다. 이 특성은 뫼르소가 태양 때문에 아랍인을 살해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에 나름의 타당성을 부여한다. 그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거대한 영향을 주는 것은 분명 몸의 감각이니까. 아랍인이 반사했던 태양 빛이 엄청난 위협이 되고 살해까지 할 ‘충분한’ 동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뫼르소의 질문 앞에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뫼르소는 무엇으로 재판 받는가


 

뫼르소의 생각은 적어도 재판장에선 타당하지 못하다고 여겨진다. 뫼르소의 재판은 개별적인 사건들을 인과 관계가 있는 일련의 이야기로 엮어내면서 진행된다. 검사는 뫼르소의 평소 행실을 열거하며 그것이 살인 사건과 명확한 인과가 있음을 증명하려 한다.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고, 장례식 다음 날 코미디 영화를 보며 사랑을 나눴으며, 부정한 의도가 있음을 알면서도 레몽을 도와주었던 사건은 연극적인 합의에 의하면 분명 부덕하기 때문이다. 부덕하다고 여겨지는 인과의 합이 부덕한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건 뫼르소의 믿음, 즉 사회적 합의가 공허한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관객은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아랍인을 계획적으로 살인할 인물 역시 아니라는 걸 목격한 증인으로서 검사의 말에 의문을 갖게 된다. 살인보다는 연극적 합의에서 벗어난 뫼르소를 사회의 불순분자로 상정하고 바로 그 이유에서 책임을 물으려는 오류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 재판이 아랍인을 죽였다는 이유로 진행되는 건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은 매정한 아들이라는 이유로 진행되는 건지 헷갈린다는 변호사의 말은 논리의 비약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뫼르소가 한 개인을 살해한 것이 아닌 한 사회의 정돈된 규칙을 살해한다는 명목으로 처벌 받는 것이라면, 그 사회는 부조리하지 않은 것인가? 만약 개인은 사회적 합의가 무리 없이 작동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으로서만 가치가 있고 그렇지 못할 경우 처벌받는 게 응당하다면, 그것이야말로 한 인격체를 존중하지 않고 부품으로 치부하는 것은 아닌가. 애초에 사회적 합의에 포함되지 못하고 탈락하는 혹은 그 협소한 규칙을 비틀고 저항해야 하는 소수자들은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인가. 그것은 어떤 정의인가. 뫼르소는 관객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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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급진적인 면모들을 조명했다. 지금 나는 이방인이 어머니의 죽음으로써 시작한다는 것을 다시 언급하고 싶은데, 어머니의 죽음은 절대적인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은유한다. 이방인을 바라볼 때는 그러한 심리적인 죽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느낀다. 관성에서 벗어난 순백의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세계를 몇 번이고 죽여야만 가능할 것이므로.

 

'죽은' 뫼르소가 생생하게 태어난 유일한 순간은 증오와 분노를 퍼부을 때였다. 자신도 다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내면을 무참히 거세하는 시선에 분개할 때 새로운 자아가 태동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처형식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증오를 퍼붓기를 바랐던 게 이해가 된다. 죽기 전에 목격한 그 생생한 증오만이 자신이 가장 멀어짐으로써 가장 가까워진 '이방인'이었단 걸 증언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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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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