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작은 목소리에 담은 거대한 의미 - 룩백 [영화]

다시 한번 영화를 접한다면 그때는 나도 울 수 있지 않을까
글 입력 2024.09.06 22:17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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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영화를 보기 전, 원작을 찾아보지 않았다. 나에게 주어진 정보 값은 ‘룩백의 원작자가 체인소맨의 작가이다.’라는 것일 뿐, 그 외의 부가적인 것이 침투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내 오롯한 생각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 감상을 앞둘 때 가지는 공통된 마음가짐이었다.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해 예측 불가능성을 만드는 것은 타인의 창작에 대한 나만의 자세였다. 동시에 작품에 대한 배려이자,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당면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당연한 것은 없다. 어떤 작품은 그 이야기의 뒷배경을 낱낱이 머리에 넣어주어야 온전하게 즐길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나에게 룩백은 그렇게 다가왔다. 누군가와 처음 만날 때 상대에 대한 기본값을 알고 있으면 대화가 수월해지고, 그 사람을 파악하기 쉬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나에게 있어 룩백은 내성적인 작품이다. 57분이라는 짧은 러닝 타임과 ‘그림으로 엮인 두 소녀’라는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는 관객에게 1부터 100까지 친절하게 떠먹여 주지 않는다. 숨겨진 의미를 굳이 대사로 풀어내 말로써 읊어내지 않는다. 자막으로 구구절절 설명하지도 않는다. 관객은 그림이 좋아서 만난 두 소녀로 하여금 전개되는 장면을 그저 흘러가듯이 바라볼 뿐이다. 서로 다른 환경과 성격을 지닌 주인공이 조그만 방에서 만화로 단합하는 창 밖의 사계절을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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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개봉 하루 만에 2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높은 관람객 평점을 기록하는 등 뛰어난 작품성을 증명했다. 그러나 주를 이루는 분위기와 달리, 영화가 끝나고 순간적으로 든 느낌은 어딘가에서 동떨어져 나온 기분이었다. 엔딩을 의미하는 영화관의 밝은 불이 켜질 때조차 당혹스럽다는 감정이 먼저 다가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가득 차오른 의문으로 머리가 아파졌다.


그렇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왜 그렇게 원작의 성공적인 애니메이션화에 박수갈채를 보냈는지. 두 소녀의 이야기에 왜 관람객들이 자신을 투영하며 웃고 울었는지. 순식간에 관객을 사로잡아 화면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영화도 있듯이, 물처럼 술처럼 스며들어 잠재우는 영화가 있기 마련이다.

 

영화를 보고 난 직후, 나는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는 복합적인 감정으로 이렇다 할 감상을 곧바로 내세우기 힘들었다. 정적이고 잔잔하게 흘러가는 영화의 흐름과 다르게 뇌리에 때려 박히는 듯한 입체적인 감각으로 뇌가 생각하기를 멈춘 것 같았다. 하지만 엉켜있던 실이 물속에서 유연하게 풀어지듯이, 단단하게 응축되어 있던 감상은 시간이 지나며 머릿속에서 개별화되고 언어라는 틀로 정돈된다.


앞서 말했듯이, 룩백을 감상하기에 앞서 전반적인 배경을 알고 보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들었다. 원작에서 내세우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했었더라면 작품을 최대치로 즐길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원작의 작가 ‘후지모토 타츠키’는 룩백을 그리게 된 계기로 동일본 대지진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말한다. 미대생임에도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 피해 복구 봉사를 자원했지만, 결국 무력감밖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에서부터 작품은 시작되었다. 개인의 힘으로 막아내지 못한 거대한 사건에서 느낀 무기력함과 우울감의 정리로 비롯된 룩백은 이후 교토 애니메이션 방화 사건에 대한 애도를 표현한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에 대해 추모한다.

 

떠나간 희생자를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은 작가의 만화에 대한 자전적인 경험을 통해 희석된다. '룩백'이라는 제목에서 나타나듯이, 작품은 등이라는 신체 부위에 주목한다. 자신은 영영 두 눈으로 볼 수 없기에 무엇보다 취약할 수 있는 위치인 등으로 함께 성장을 도모해 나가는 두 소녀의 모습을 은유한다.


2-3시간의 영화가 당연해지고, 화려한 액션과 자극으로 점철된 시대에서 룩백은 꼿꼿하게 작가의 의도를 전달한다. 1시간도 채 되지 않는 제한된 분량 속에서 조곤조곤 해야 할 말을 남긴다. 그 조그만 목소리에는 부피를 따질 수 없는 거대한 의미가 잠겨있다. 그렇기에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여 집중한 사람만이 영화의 막이 오른 후 눈물을 흘릴 자격을 가진다. 시간을 되돌려 다시 한번 영화를 접한다면 그때는 나도 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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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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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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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운양파아몬드
    • 저도 같은 영화를 보고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어요. 나무위키, 블로그 해석을 보고 나서야 조금은 알겠더라고요. 이 글을 보고 나니 저 역시도 다시 보게 되면 어떨지.. ㅎㅎ 잘 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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