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각자의 감옥 안에서 [영화]

글 입력 2024.09.0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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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정해놓은 틀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있을까? 그 누구든 쉽게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순 없을 것이다. 특히 내가 울타리 밖에 속해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틀은 끊임없이 나를 따라오며 옥죌 게 뻔하다.


이런 생각의 끝엔 사회의 “정상”이란 틀은 누가 만든 것이며, 무엇일까 하는 근원적인 물음으로 나를 이끈다. 담을 넘어 저 너머의 넓은 곳으로 달려 나가는 소녀와 소년들이 있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2023)이다.


<아가씨>와 <괴물>을 보며 겹치는 부분이 많은 영화라 생각했다. 먼저, 두 영화 모두 세 부분의 챕터로 나누어져 있다는 구조적인 측면이 그러하다. <아가씨>의 1부에선 숙희의 시점으로 히데코와 히데코의 삼촌인 코우즈키, 그의 저택 그리고 숙희를 계획에 끌어드린 백작을 비춘다. 하지만 2부에선 1부의 내용을 뒤집기라도 하듯, 히데코의 시점으로 이 모든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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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서 2부로 넘어가는 부분에서는 숙희의 내레이션을 통해 히데코를 설명하는데 이 대목에서 관객은 ‘천지간에 아무도 없는’ 히데코를 다시 돌아보게 되고, 숙희와 히데코의 관계에 대해 되짚어보게 된다. 관객은 2부가 진행되며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무엇이 진실인지 서서히 깨닫게 되며 2부의 후반부(“서재 씬”, “들판 씬”)에는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엔딩으로 달려가는 3부는 여성적 연대를 통한 복수를 성공시키며, 견고해 보이던 남성 권력을 상징하는 백작과 코우즈키는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꽂으며 자멸하게 된다. 백작의 ‘그래도 자지는 지키고 죽을 수 있어 다행이다..’라는 대사가 이토록 웃기게 들리는 이유는 여성을 착취하며 욕망을 채우던 남성 권력의 가당치도 않은 마지막 비명처럼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괴물> 또한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챕터별로 사건을 바라보는 시점의 주체를 바꿔가며 사건을 이리저리 보여준다. 1부는 미나토의 엄마 시점, 2부는 호리 선생의 시점, 3부는 미나토의 시점으로 진행되는데 <아가씨>와 비슷하게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관객으로 하여금 오해를 쌓게 하고, 스토리를 추리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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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지점에서도 약간의 차이는 존재하는데 <아가씨>는 1부(숙희 시점)에서부터 히데코에 대한 숙희의 묘한 감정을 보여주며 영화가 도달하고자 하는 방향을 조금씩 던져준다. 하지만 <괴물>은 1부와 2부를 거쳐 마지막 3부에 도달해서야 모든 진실이 드러나고 미나토와 요리의 관계에 대해 비로소 도달하게 된다.


아무것도 몰랐던 어른들은 태풍으로부터 징벌을 받지만, 아이들은 햇살이 비치는 들판에서 영화 내내 짓지 않던, 지을 수 없었던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방식으로 승리한다.


두 영화의 엔딩씬은 마치 소녀와 소년들이 이 세상과는 다른, 새로운 공간에서 그들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는 공통점을 보이기도 한다. <괴물>의 엔딩씬은 영화 내내 보여주던 톤앤매너와는 다르게 이질감이 들 만큼 따스하고도 희뿌연 화면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관객은 미나토와 요리의 생사와는 관계없이 아름답고도 행복해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아가씨>의 엔딩씬의 배경은 바다를 통해 제시되는데 파도와 그 위에 휘영청 떠 있는 달, 바닷물에 반사되어 보이는 달빛이 더욱 그 공간을 환상처럼 느껴지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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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의 히데코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대사를 영화에서 총 세 번이나 들려주는 것에서 느낄 수 있을 만큼 히데코는 자기 삶에 대한 근원적 물음과 존재론적 우울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숙희를 마음에 품은 후의 히데코는 오로지 숙희와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살아간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어떻게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헤쳐간다.


변태 같은 남성들을 세워두고 음란서적을 읽는 낭독회의 순간에도 히데코는 숙희를 상상하며 서적을 읽어 객석에 앉은 모든 남성을 허수아비처럼 만들어버린다. 그 순간, 남성들은 히데코와 숙희 사이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존재로 추락한다. 히데코를 숨 막히게 하던 저택 또한 지금 이대로도 숙희만 같이 있어 주면 괜찮을 곳이 되는 것이다.


히데코와 비슷하게 <괴물>의 미나토는 아버지의 불단 앞에서 ‘나는 왜 태어났어?’라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한다. 하지만 그토록 공허한 질문이 무색하게도 미나토는 요리를 만나는 모든 순간에 웃음을 보인다. 미나토와 요리는 버려진 기차 칸을 아지트처럼 꾸며, 자신들만의 천국에서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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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터널 너머, 당도한 천국. 그곳은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터널을 넘어 당도한 판타지적 요소를 지닌 공간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미나토와 요리의 아지트는 바깥세상의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곳 같다.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미나토이자 요리로서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그곳에서 미나토는 영화를 통틀어 처음으로 대답이 돌아올 수 있는 청자인 요리에게 헤어지고 싶지 않단 진심을 말한다.


이처럼 <아가씨>와 <괴물>은 사회가 정한 틀 안의 정상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또는 정상성의 권력에서 기인한 폭력으로 인해 피해를 본, 틀 밖의 자들이 스스로 세계를 구축하여 나간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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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적-정상성에 갇힌 나머지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남성 캐릭터들은 히데코와 숙희가 서로 사랑에 빠질 것이라는 정상성에서 벗어난 경우의 수를 예측하지 못한 채 몰락한다는 방식으로 <아가씨>는 정상성을 뒤집는다.


또한, <괴물>의 미나토와 요리는 사회에 만연하게 깔린 정상성을 강요하는 분위기로 인해 보이지 않는 내면의 압박을 당한다. 정상성의 강요라는 것이 없었더라면 영화 내에서 발생하지 않아도 될 사건들이 그려지는 듯하다. 아니, 어쩌면 더 크게는 <아가씨>와 <괴물>은 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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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해 온 것들이 폭력적으로 다가오는 그 순간을 우리는 감지해야 한다. 그 순간을 감지하는 찰나들이 모여 각자를 옥좨오던 정상성이란 이름의 감옥에서 탈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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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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