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을바람에 천천히 거니는, 나의 산책 채집기 [도서/문학]

이유운 시인의 산문집, <산책채집>
글 입력 2024.09.09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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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고정적인 수입이 있어서 직업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게 아니더라도,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어느 열여섯의 꿈을 이뤘음을 문득 체감할 때는 기분이 좋다. ‘글을 적음’이라는 행위에 대해 내가 가지는 의미를 변화시키기 위해 여러 해를 휘청휘청 걸었다. 숱한 일상성과 비일상성을 몸소 겪으며 생각한다. 내 마음의 원형을 타자에게 가감 없이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내게는 글쓰기이겠다고.


글쓰기에 돌입하고 몰입하기 위한 나만의 가장 최적의 방법은 환경을 조금씩 변모시키는 것이다. 삶 속 어느 챕터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갑자기 생뚱맞은 일도 해보고,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과 친구가 되거나 돌연 익숙한 골목에 위치한 새로운 장소를 찾아가는 것. 그게 지금까지 나의 글쓰기가 살아있는 방식이다.


글을 쓰다 보면 필히 독서한다. 내게는 아웃풋과 인풋의 개념이다. 글을 쓰기 위해 투입하는 인풋에는 사실 여러 종류의 것이 있다만, (가령 대화와 사유, 누군가의 옷차림과 음악 같은 것들) 이 둘은 한 방향이 아닌 양방향의 관계임을 분명히 하고 싶다. 글을 읽으면 글이 써지고, 글을 쓰면 글이 읽고 싶어진다. 그렇게 좋아지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탑포는 최진영, 정세랑, 안미옥, 그리고 이유운님이다.


폴란드에서부터 읽고 싶었던 이유운 시인의 새로운 산문집, <산책채집>을 드디어 읽게 되었다. 이번 산문집 역시 사랑과 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삶을 이루는 가장 주된 요소들이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의 메인 키포인트는 시인이 여기저기 거닐었던 장소들과 그 공간으로부터 창출된 사유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일상과 비일상이 담겨 있는 수필. 1부의 전반은 시인의 일상에서 저 멀리 떨어진 어느 장소에서 겪었던 산책에 대한 이야기이고, 2부는 일상에서 걸어왔던 산책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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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함을 영위하기 위하여



 

평범한 일상을 반복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을 수 있는 건 재능이기도 하다. 쉽사리 자신의 삶을 지겨워하지 않고, 그 굴레를 계속해서 견디는 거 말이다. 늙은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비슷한 생활이, 평범한 일상이 주는 무료함과 지겨움을 성공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낸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p.79~80/ '일본, 기타큐슈'

 

 

1부에서는 저자의 스페인 톨레도, 인도네시아 발리, 튀르키예의 이즈미르 기차역과 안탈리아 그리고 일본 기타큐슈에서의 산책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위의 부분은 ‘일본, 기타큐슈’ 챕터의 일부이다. 저자는 기타큐슈에서 새로이 발견한 이자카야의 마마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마마는 자신이 일흔 살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말하는데, 저자는 마마의 그 말을 듣고 자신이 행했던 일상으로부터의 숱한 도망들과 마마가 이끌어온 평범함의 묵직한 힘에 대해 생각한다.


저자는 평범함이 두려워 자주 여행을 다닌다고 하는데, 나는 새로운 자극과 깨달음 앞에서 가끔 주저하는 편이다. 내가 세상을 넓게 보는 사람이 되었다는 오만에 빠질까 봐 두렵고 다시는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아질까 봐 불안하다. 그리워할 것들이 더 많아지는 것도 무서웠고. 일상은 그동안 살아남은 내가 겹겹이 쌓여있는 페이스트리 같은 무언가다. 그 애가 없으면 나도 없다. 유럽에서 생활하는 동안 낯선 여행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지만, 일상을 온전히 뒤바꾸는 무언가를 할 때는 여전히 머뭇댄다. 내가 견고하게 쌓아온 나보다 나에게 더 알맞은 세상이 있을 거란 확신이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 중 문득 나를 찾아오는 영감이 일상에서의 것보다 더 큰 무언가를 가져다준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내가 폴란드 크라쿠프에 있었을 때, 종종 광장 변두리 벤치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던 한 노인이 있었다. 머리칼이 노란 햇빛 아래서도 새하얗게 빛을 내던 노인. 곧고 정갈한 자세로 바이올린을 단단하게 다잡고 연주하는 모습은 어떤 노인으로 살고 싶은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끔 해주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한 노인이 되고 싶다. 나이 들어감을 야속해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평범함만을 예찬하지는 않겠지만, 평범함의 놀라운 성실함은 나를 마음이 빳빳하게 잘 마른 노인으로 만들어 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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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계를 조금씩 훔쳐서, 내 세계에 기워 넣는 일



 

여기서 내가 시를 쓰는 시간은 주로 도서관으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를 타거나, 19시 이후 출근 혹은 수업 때문에 지하철을 탈 때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한다. 내가 절대 알 수 없는 수많은 세계가 와르르 쏟아졌다가 다시 와르르 벗어난다. 모두 바쁘게 무언가를 위해 걸어가는 동안, 나는 자리에 앉거나 서서 절대로 바깥으로 흘러 나가지 않을 내 세계를 어떻게든 붙잡아 문자로 만들려고 애쓴다. 마찬가지로 이 글도 사당행 2호선 지하철 2480호에서 쓰고 있다.

 

p. 147/ '서울 생활 4:'

 

 

간혹 어떠한 방식으로든 내가 쓴 글을 보여준 이후에는 ‘너처럼 무던한 애가 어떻게 그런 글을 써?’라던가, ‘지은이의 글은 문학 같아’라는 말을 듣는다. 내 글은 내가 봐도 가끔 간결하지 못하고, 하고 싶었던 말들이 여기저기 뭉쳐있거나 어디론가 사라져서 다른 문장이 그를 대체한다. 급한 호흡. 밭은 숨을 문장의 말미들이 뱉어낸다.


저자는 생계를 위해 번역 일을 하고, 예술을 위해 시를 쓴다. 그렇지만 ‘예술에 잡아먹히지 않는 삶’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생활이 생활 자체일 수 있도록 일상의 성실함을 가꾸고, 글쓰기를 습관같이 몸에 달라붙어 있는 무언가로 만드는 것. 한편으로 저자는 ‘증상적인 글쓰기’도 사랑한다. 금이 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내 손에서 돋아나는 수많은 벽, 단단한 무너짐, 역겹거나 슬픈 것. 아름답다.’ 


저자의 글을 그간 좋아해 왔던 것은, 각자를 구성하는 세계로부터 나의 모습과 마음이 만들어진다는 것에 저자와 나 모두 동의하기 때문이다. 나는 소중한 사람들이 생겨날 때마다 내 세계에다 조금씩 내가 사랑하는 그들의 모습을 깁는다. 꼼꼼하지 못한 서툰 바느질 솜씨로 느릿느릿. 잠시 펼쳐도 보았다가 다시 동그랗게 모아서 찬찬히 구경하고. 나는 내 내부의 이야기를 발화함으로써 내보이는 재주가 없다. 그래서 글을 쓰니까 자꾸만 문장들이 뭉치는 거다. 그래도 쓴다. 어찌 되었든 전해야 하니까. 고맙고 사랑했고 서러웠다고.


저자의 관점으로 볼 때 내 글은 대부분 증상적인 글쓰기를 통해 토해내진 부산물이다. 내 글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구체적인 모습이 뮤즈가 되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내 어깨를 다독이던 손이나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목구멍에서 나를 꿰뚫고자 달려 나오던 가장 검은 말. 눈빛으로 내게 편지를 적던 사람과 내 청춘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던 어슴푸릇한 누군가와의 밤 산책이 나를 만들고, 나는 그런 내 모습을 계시받은 신성한 누군가처럼,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받아 적는다. 그렇지만 나 역시도 어떤 증상으로서 글을 쓰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 같다. 좋아한다.


수없이 와르르 쏟아지는 세계. 이번 가을에는 또다시 울음을 무릅쓰고 밀려 나오는 그리움을 여기저기에 기우고 싶다. 그래야 내 세계가 더 커질 테니까. 형태를 신경 쓰지 않고 이것저것 휘갈긴다. 나중에야 어떤 건 시가 되고 어떤 건 수필이 된다. 이것들은 어떨 땐 사랑을, 어떨 땐 그리움을, 어떨 땐 분노를 원인으로 나타나는 증상들이다.

 

 

 

내가 거닐어 만든 역사


 

수필을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삶을 걸으며 고집스럽게 남겨놓은 사료(史料)를 훔쳐보는 일과 같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고유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역사를 편안한 얼굴로 찬찬히 훑는다. 나와 같은 사건을 겪은 역사를 보고 안심한다. 내가 아직 적지 않은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적어야 하는지 배우는 것이다.


이유운의 <산책채집>. 친구들에게는 아침 7시 햇살을 맞으며 창가에 서 있을 때 읽기 좋은 책이라고 소개했다. 사실 누군가의 삶을 훔쳐본다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지만, 왜인지 이유운 시인의 글로 그의 삶을 훔쳐볼 때면 꼭 나의 것을 미리 보는 기분이다. 적당한 온도의 흙길을 곧게 밟고 서서 느린 속도로 걸으며, 부산스럽지 않게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을 응시하는 느낌을 받는다. 또 다른 나의 삶이 가을바람과 함께 불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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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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