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 열기가 식기 전에 - 한여름의 판타지아 [영화]

글 입력 2024.09.09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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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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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날씨가 되었다. 이틀 전 밤 기온이 내려가고 이슬이 맺히는 백로가 성큼 다가왔고 우리는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낮은 무더위라 모두가 열기에 휩싸인다.


일상을 지내다 보면 계절은 금세 제 몸을 바꾼다. 이 더위가 식기 전에 소개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 매미와 풀벌레 울음소리가 한여름의 음악이 되고, 펑펑 터지는 불꽃놀이는 고요한 밤 꿈같은 사랑의 이야기를 알리는 팡파르가 되는 영화. 바로 <한여름의 판타지아>다.

 

이 영화는 현재 상영 중인 <한국이 싫어서>(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의 감독인 장건재 감독의 작품이다. 영화는 두 가지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첫사랑, 요시코’로, 일본의 오랜 마을인 나라현 고조시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자 하는 감독 ‘태훈’과 조감독이자 통역을 하는 ‘미정’은 마을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현장을 따라간다. 태훈과 미정은 마을 소개를 도와주는 '겐지'의 첫사랑 ‘요시코’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겐지는 오사카에 있을 적 한국에서 유학을 온 여학생이 요시코와 너무 닮아 심장이 멎을 뻔했다며 짧지만 강렬했던 그녀와의 사랑을 담백한 떨림과 함께 전해준다.


그날 밤, 태훈은 자신이 겐지가 되어 요시코를 만나는 꿈을 꾼다. 꿈에서 깨어난 태훈. 밤하늘엔 불꽃놀이가 터지고 있다. 그럼 순식간에 영화는 우리 모두를 태훈의 영화 속으로 뛰어들게 한다. 그 이야기가 바로 2부 '벚꽃우물'이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 일본 여행을 온 '혜정'. 혜정은 역전 안내소에서 아버지의 고향인 고조시에 정착해 감을 재배하며 살아가는 '유스케'를 만난다. 유스케는 혜정에게 한눈에 반해 가이드를 자처한다. 가벼운 농담을 하며 고조시를 걷는 두 사람. 서로의 감정을 깨닫고 한여름 밤 수줍은 떨림을 공유하지만 이내 이어지지 못한 채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이야기의 골조는 겐지의 기억 속 이야기이다.


 

 

Chapter.1 한여름의 '기억'


 

영화를 보고 나면 '인터뷰'라는 것이 참 신기하게 느껴진다. 한 사람의 기억과 당시의 느낌, 감정이 그 사람의 입을 통해 세상에 드러난다. 그 사람의 기억이었을 것이 한순간에 여러 사람의 기억 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그 넘겨받은 기억을 토대로 비슷하지만 또 다른 기억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점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가 떠오르기도 한다.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리뷰를 살펴보면 1부는 2부보다 지루하단 평이 있다. 그도 그럴 게 1부는 흑백화면과 더불어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어 롱테이크를 통해 한 장면을 살펴볼 겨를이 많다. 1부는 이렇다 할 자극적인 사건도 없다. 그저 태훈과 미정이 도시로 떠나지 않고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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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는 사운드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시각적인 정보보다 청각적인 정보가 지속적으로 주입되는 영화라 봐도 무방할 정도다. 영상에 깔린 배경음에 집중하면 여름을 상징하는 녹음과 쨍한 하늘이 보이지 않더라도 한여름을 물씬 느낄 수 있다.


나에게 있어 1부는 ‘고조시'와 그 마을 사람들을 주목해 달라는 무언의 메시지처럼 다가온다. ‘여기 이런 마을,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하고. 지나치게 고정된 카메라, 다큐멘터리 형식이지만 어딘가 인위성이 보이는 연출들. 1부에서 들려오는 사운드와 카메라의 위치를 의식하다 보면 고조라는 공간 자체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관찰자가 된 고조시. 즉 '기억'을 하나의 테마로 잡는다면 태훈과 미정이 거닐며 고조를 알아가는 순간 또한 고조의 기억 일부분이 될 테다. 가령 '그 옛날 한국 영화감독과 통역사가 온 동네 사람들에게 아무 이야기라도 좋으니 기억을 들려달라 하곤 했지….' 하고 말이다. 그 기억은 사람과 공간을 통해 차근차근 흘러 오늘날의 우리에게 도달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처럼 말이다.

 

 


Chapter.2 한여름의 '코이'


 

영화는 '판타지아'라는 제목을 충실히 따른다. 불꽃놀이를 기점으로 형식과 내용을 자유롭게 변형하는 영화. 불꽃놀이가 등장하면서 흑백화면은 컬러로 뒤바뀌고 움직이는 법이 없던 카메라는 느리지만 쉴 새 없이 패닝 한다. 이처럼 영화는 친절하게 1부와 2부가 다름을 확실히 해준다.


앞서 말했듯 2부는 태훈이 만든 영화로, 혜정과 유스케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스케는 혜정에게 고조시의 우물에 얽힌 전설을 얘기해 준다.

  

"옛날에 불교의 훌륭한 스님인 '홍법 대사'라는 분이 여기로 오셨는데 목이 말라서 어떤 할머니한테 물 좀 달라고 하셨대요. 근데 그때는 이런 게(우물) 없어서 일부러 저쪽 요시노 강까지 물을 가지러 갔다 왔대요. 대사는 그 노력을 보고는 마음이 움직여서 지팡이로 여기 땅을 팠는데 그때 솟아난 물이 이 우물이에요."

 

이 우물이 바로 2부의 소제목이기도 한 '벚꽃우물'이다. 벚꽃우물 전설은 우연으로 시작해 노력을 기울여 얻어낸 기적을 이야기한다. 누군가 생각나지 않는가. 바로 유스케. 혜정을 놓치고 싶지 않아 땀범벅 일지라도 역전 안내소에서 말을 거는 용기, 함께 불꽃놀이를 보러 가자며 말할 수 있는 용기란 어디에서 솟아난 샘물일까. 누군가가 나를 위해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위해 온 마음을 다 할 수 있는 사랑은 마치 전설 같고 꿈같다.

 

"할머니는 이 물을 마셨는데 갑자기 젊어져서 대사랑 사랑에 빠졌어요. 대사는 여기에 며칠 계시다가 떠났는데 할머니가 아이를 배서… 태어난 게 여기 있는 잉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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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 잉어(コイ, 鯉)이기도 사랑(こい, 恋)이기도 한 것.


결국 혜정과 유스케의 사랑도 전설처럼 이어가지 못한다. 할머니와 대사는 사랑에 빠졌으나 대사는 떠나야만 했다. 혜정도 남자친구(두 사람의 관계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가 있으며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기에 유스케가 제안한 불꽃축제를 거절한다. ‘잉어’는 '사랑'이다. 이끌림을 외면하려 노력했던 혜정이 일본 한 마을에 남겨두고 간 사랑인 것이다. 그렇게 짧지만 담백하고도 설렜던 한여름 밤의 사랑이 막을 내린다.

 

1부가 없다면 2부의 환상 같은 한여름 밤의 사랑이, 그리고 영화를 보며 느끼게 되는 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부디 이 계절의 열기가 식어버리기 전에 한껏 샘솟는 한여름의 사랑에 빠져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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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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