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단순한 코미디 뮤지컬처럼 보이지만 1 - 젠틀맨스 가이드 [공연]

피 튀기는 희극 뮤지컬 <젠틀맨스가이드 : 사랑과 살인 편>
글 입력 2024.09.1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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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젠틀맨스가이드: 사랑과 살인편>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던 작품을 제작사 쇼노트가 수입해 2018년 라이선스 초연을 올렸으며, 24년 7월 6일부터 10월 20일의 기간동안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4연이 공연되고 있다. 이 뮤지컬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가난한 몬티 나바로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친 후 찾아온 어머니의 지인 미스 마리에타 슁글을 통해 자신이 다이스퀴스 집안의 후계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귀족 집안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스페인 출신 뮤지컬 배우를 만나고 그가 별 볼일 없는 존재라는 이유로 집에서 의절을 당한 것이었고, 어렸을 때 몬티의 아버지가 죽는 등 그 이후로 힘들게 살아왔지만 다이스퀴스 집안 사람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음이 밝혀진다. 네가 백작이 되는 것은 지렁이가 걷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애인 시벨라의 말을 들은 몬티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보장할 백작이 되기 위해 자신의 위에 있는 다이스퀴스 가문의 8명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이 긴 살인의 과정을 코믹하게 연출하며 그려낸 것이 <젠틀맨스 가이드>이다. 몬티가 죽이려고 시도하는 다이스퀴스 캐릭터들, 그리고 후반부에 등장하는 천시 다이스퀴스는 한 명의 배우가 맡고 몬티의 어머니인 이사벨 다이스퀴스의 사진 역시 다이스퀴스를 맡은 배우의 얼굴로 등장한다.

 

 

 

다이스퀴스 살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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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티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죽음을 유도했던 다이스퀴스의 공통점은 그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정신은 갖다버린 채 자본가의 폐해를 그대로 행하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위선적인 귀족이라는 것이다. 몬티의 편지를 무시한 에스퀴스 2세는 여배우와 간통을 저지르고, 에제키엘 목사는 성직자라면 요구되는 자비의 정신 대신 ‘주님의 뜻’이라는 말만 반복한다. 이 외에도 옥스포드 지방의 땅을 사들여 독점하는 대지주이자 양봉업자 헨리, 자선 사업을 사교계에서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오촌 이모 레이디 히아신스, 연기를 못하지만 무대에 서고 자신 위주로 연극을 바꿔버리는 연극계의 살아있는 부정의 레이디 살로메, 보디빌더이고 채식주의자이지만 우생학을 신봉하는 바톨로뮤 소령이 있다. 몬티에게 은행에서의 일자리를 주었던 에스퀴스 1세는 심장마비로 자연사하고, 최종적 목표물 애덜버트 백작까지 몬티는 퀘스트를 깨듯 한 명씩 처리해야만 한다.

 

몬티는 이들을 스케이트장에서 얼음을 깨 놓거나(에스퀴스 2세), 그들이 위험에 처한 상황을 방관해 추락사하거나(에제키엘 목사) 무거운 역기가 목을 압박해 잘리도록 하거나(바톨로뮤 소령), 벌들이 꼬이도록 스프레이를 뿌리거나(헨리), 연극에 사용되는 소품 총을 실제 총으로 바꿔치기하고(레이디 살로메), 일부러 말라리아가 돌거나 폭동이 발생한 해외의 다른 나라를 자선 사업 장소로 소개해주어(레이디 히아신스) 그들을 죽도록 한다. 이때 한 장면마다 코믹하게 그려지는 다이스퀴스들의 위선과 악행은 그들을 ‘죽어도 통쾌한’ 이들로 만들고, 따라서 몬티의 살해 시도는 서사 내에서 정당화된다.

 

 

 

코미디의 형식을 띤 ‘재생산’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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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스퀴스들을 향한 몬티의 살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불쌍한(가난한) 몬티(‘poor Monty’)는 귀족 몬티 다이스퀴스 나바로가 된다. 미스 슁글이 몬티를 찾아와 ‘너는 다이스퀴스’라고 알려줬을 때부터, 몬티는 ‘신사-되기’, ‘귀족 되기’를 수행하며 시벨라가 귀여워했던 몬티의 어리숙함은 성장하며 변화된다. 즉, 몬티의 살인 과정과 몬티의 성장은 나란히 병치되며, 몬티의 신분 상승 욕망이 그 성장의 동력이다. 하지만, 이를 과연 ‘성장’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가? 다이스퀴스의 ‘귀족’이라는 신분 자체가 그들의 악덕을 지속시키는 점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몬티가 귀족이 된다는 것은 그들의 신분과 함께 그들의 악함을 그대로 물려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몬티의 살인이 진행되면서 몬티는 점점 그 어떤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게 되며,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초반부 첫 살인의 상대인 에제키엘 목사의 죽음을 방관하게 했던 핵심적인 원인이기도 했던 어머니를 도와주지 않은 다이스퀴스에 대한 복수심이 살인을 정당화하는 기제 중 하나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점점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할 필요조차 찾지 못하고 도덕적 성찰 자체를 시도하지 않는 몬티의 모습은 그의 의도에서 점점 신분과 재산이라는 세속적인 욕망의 비중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시벨라와의 관계를 유지한 채 피비에게 청혼을 하는 몬티의 모습은 다이스퀴스(정확히는 에스퀴스 2세)가 여배우 에반젤린 발리와 저지르던 불륜과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이처럼 서사가 진행될수록 몬티는 점점 다이스퀴스의 위선을 닮아 간다. 몬티를 도왔던 미스 마리에타 슁글이 하던 “너는 다이스퀴스”라는 대사와 그걸 들은 몬티가 “나는 다이스퀴스”라고 선언한 그 순간부터, 다이스퀴스들을 죽이기 시작한 몬티 역시 결국 다이스퀴스이고, 그들의 악덕과 운명을 그대로 답습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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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티의 운명이라는 측면에서 작품 속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흥미로운 포인트는 2막 후반부에 등장하는 천시 다이스퀴스의 존재이다. 감옥을 청소하는 등 허드렛일을 하는 천시는 에스퀴스 2세가 언급한 귀족 가문에서 누락된 그의 사촌 ‘만시’의 아들이자, 몬티의 다음 순서가 되는 후계자라고 할 수 있다. 몬티가 자칫하다간 사형을 당할 수 있는 재판을 앞두고 감옥에서 쓴 자신의 일기장을 놓고 오자, 천시는 그것을 몬티에게 그대로 돌려주며 몬티는 시벨라와 피비, 그리고 애덜버트의 잔에 독을 넣은 진범이었던 미스 마리에타 싱글을 비롯한 모두의 환영을 받으며 퇴장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천시가 등장하며 몬티가 다이스퀴스를 죽이기 전 고민하면서 읊었던 ‘내 주머니 속 독’의 가사를 반복하고, 무대 화면으로 등장하는 ‘젠틀맨스 가이드’라는 일기장이자 회고록의 이름이 몬티에서 천시로 바뀐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앙상블의 가사로 막은 내려가는데, 결국 ‘다이스퀴스’인 몬티도 결국 천시에 의해서 자신이 다이스퀴스들에게 행했던 죽음을 겪게 될 것이라는 점이 암시되며 기묘한 여운을 남긴다.

 

천시가 몬티의 살인 고백이 담긴 일기장을 왜 쉽게 고발하지 않고 몬티의 범죄를 일단은 묵인한 상태로 그대로 돌려줬을까? 순진하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던 천시는 몬티의 진실을 알고 수상한 죽음들에 대한 정황을 밝히는 (사법적, 윤리적) ‘정의’의 구현을 택하지 않는다. 반대로 천시는 몬티의 기록을 통해 몬티의 ‘방법론’을 학습하고, 몬티의 사고방식 역시 그대로 체화해 몬티를 모방한다. 몬티가 다이스퀴스들을 죽이며 그들의 신분과 악덕을 동시에 물려받았듯이, 몬티의 회고록을 천시가 읽으면서 몬티가 행한 행위의 대물림이 발생한다. 또한 이는 어떠한 의미에서는 진화다. 몬티의 부정이 모두에게 드러나지 않고 은폐된 상황 속에서 천시의 부정이 더해질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작품은 귀족이라는 신분과 계급의 재생산을 부정의의 재생산과 등치시키며, 코미디라는 형식을 통해 피 튀기는 살인을 희극적인 것으로 변모시킨다.

 

 

 

시벨라와 피비, 부제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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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뮤지컬의 부제에 등장하는 두 단어인 ‘살인’과 ‘사랑’은 작품 내에서 나란히 교차한다. 이 이야기의 흐름은 몬티가 신분과 함께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과도 연결된다. 몬티는 연인이자 라이오넬의 아내인 시벨라 홀워드와의 사랑(비합법적 자원)도, 혼인 관계에 있던 피비 다이스퀴스와의 사랑(합법적 자원)도 모두 쟁취하게 되면서 신분과 재산, 사랑을 모두 쟁취한 ‘승리자’가 된다.

 

시벨라는 허영심 가득하고 돈과 사랑을 모두 향유하려는 인물이기 때문에 애인이었던 몬티를 외면하고 약혼자 라이오넬 홀란드와 결혼을 하지만, 몬티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가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인물이다. 피비는 다이스퀴스 가문의 여인이지만 몬티보다 상속에 있어서 아래 서열에 있기 때문에 피비의 오빠 헨리와 달리 처음부터 제거 대상의 반열에 들지도 않은 여성이자, 전형적인 다이스퀴스인 헨리와 달리 몬티에게 처음부터 호감을 얻은 존재이다. 욕망의 대상인 시벨라가 결혼한 뒤 몬티는 친절하고 순결한, '고결한 영혼'을 가진 피비가 자신이 백작이 되었을 때 백작부인의 역할에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피비에게 청혼한다. 2막에서 시벨라와 밀회를 즐기다가 피비가 찾아와서 청혼을 승낙하겠다고 말하자 둘 사이에서 다른 상대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이분화된 공간을 왔다갔다하며 고군분투하는 장면은 이 뮤지컬에서 희극적인 요소로 잘 알려진 장면 중 하나이다. (“결혼할 거야, 그대랑”, I’ve decided to marry you)

 

시벨라와 피비라는 캐릭터의 차이가 대비되어 보이는 또 다른 장면은 백작 성에서의 만남 이후 애덜버트가 의문사하고 백작이 된 몬티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감옥에 갇힌 후의 장면이다. 두 사람 모두 몬티를 살인 혐의에서 해방시켜 살려야 하고, 서로가 연적임을 인식한 상황에서 시벨라가 피비를, 피비가 시벨라를 애덜버트의 살인범으로 지목하고 (“그 끔찍한 여자” That horrible woman), 각각 경감과 판사에게 상대방이 살인을 도모한 편지를 증거로 제시한다. 증언이 엇갈리고 법적 모순이 생기자 몬티는 배심원단의 판단 하에 풀려나게 된다. (이때 시벨라의 빨강과 피비의 파랑이라는 의상과 편지의 색감 대비가 시각적 형식성의 측면에서 돋보인다.) 이때, 몬티의 양 옆에서 나란히 서서 백작 성으로 가는 그들의 모습은 그들이 서로 내통해서 몬티를 구하기 위한 계획을 펼쳤고, 그것이 성공했음을 암시한다.

 

몬티의 아내이자 백작부인이 된 피비는 몬티를 살리기 위해 연적인 시벨라와 연합하는 행위까지도 불사한다. 피비는 몬티를 그만큼 사랑한 것일까? 아니면 부유한 남자와 결혼한 시벨라처럼 백작 부인으로서의 자리를 사랑한 것일까? 어쩌면 피비는 몬티를 사랑하는 것이 귀족 여성인 피비가 택할 수 있는 전략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피비는 아마 자신의 오빠인 헨리가 몬티의 계획으로 인해서 벌에 쏘여 죽음을 맞이했음을 후반부에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같은 남매이지만 오빠인 헨리는 몬티보다 상속 서열이 높은데, 왜 여동생인 피비는 몬티보다 더 낮은걸까? 피비는 헨리의 ‘배 다른 동생’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젠더의 차이도 있겠지만, 피비는 헨리나 몬티에 비해 상속에 있어서 불리한 점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위의 내용들은 단지 가설에 불과한 추측일 뿐이지만, 이러한 수상한 맥락 속에서 피비가 몬티를 사랑하는 것이 오로지 순수한 연애 감정과 존중과 신의가 기반이 되는 혼인 관계가 가지는 종교적, 그리고 윤리적 권위에 대한 인정에서 기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낭만적 사랑에 대한 환상 역시 당시 사회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피비의 선택에 결혼이 계급 재생산과 유지의 도구라는 세속적인 논리가 개입되지 않았다고 단언하긴 어렵다. 계급의 재생산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몬티와 피비의 결혼이 일종의 ‘족내혼’이 된다는 것도 주로 왕족 같은 높은 신분에서 친척 간의 혼인이 부와 지위의 분산을 막기 위한 것으로 사용된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의미심장하다.

 

분홍색을 포함한 붉은 계통 의상을 내내 입는 시벨라와 파랑 계통의 의상을 입은 피비라는 시각적 구도, 그리고 그 둘을 욕망과 쾌락 대 고결함과 순수라는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몬티의 오만은 뮤지컬계를 포함한 예술계의 남성중심적 악습이자 구도인 ‘성녀 창녀 이분법’을 연상시키지만, 모든 캐릭터들의 무결함 자체를 의심할 수 있도록 하는 블랙 코미디적인 요소는 몬티와 피비, 시벨라 모두의 욕망을 의문시하면서 동시에 이를 도덕적, 혹은 윤리적으로 정당화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바로 이 점에서, 붉은 옷의 시벨라와 파란 옷의 피비가 등장하는 <젠틀맨스가이드>는 하얀 옷의 엠마 대 빨간 옷의 루시라는 이원화된 여성 캐릭터로 서사를 전개하며 여성주의적 관점의 비평에서 혹평을 피할 수 없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와는 다른 길을 겪게 된다. 이 작품 속에서 사랑과 신분, 돈을 동시에 추구하는 시벨라와 몬티의 모습은 서로 닮아 있고, 시벨라의 위선을 비난할 서사적인 근거는 사라져버린다. 몬티와 시벨라, 몬티와 피비의 사랑이 결말 부에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낭만의 결정체라기보다는 상이한 욕망들 속의 일시적인 연합일 뿐이기에,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면서 조건만 지키면 그대로 유지될 안정적인 토대에서 이뤄진 관계이기도 하다. 희극의 형식으로 '살인'을 통한 재생산을 다루는 이 작품은 '사랑'이라는 낭만화된 개념 역시 신분과 계급, 가부장제 속 혼인제도를 경유하게 된다는 것을 내포하며, '사랑과 살인 편'이라는 부제의 의미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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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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