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를 잊은 그대에게 [도서/문학]

시를 잊고 싶지 않은 내가
글 입력 2024.09.12 01:1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photo-1513270327160-516b92ed40e9.jpg

 

 

시(詩)는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 누군가에게는 업, 누군가에게는 소소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활자.

 

학생 때를 마지막으로 오랜 시간 들춰보지 않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문학의 장르도 결국 취향의 차이라고는 하지만, 사람들에게 시가 잊혀진다고 생각하면 퍽 슬퍼진다.

 

시는 작가만의 소산물이 아니다. 읽는 이와 함께 호흡하며 익명의 감정으로 교감하는 글이다.

 

단 한 줄의 문장이라도 당신의 삶에 울림을 선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시와의 만남


 

내가 처음으로 이 문학을 접한 것이 정확히 어느 시점이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에게 마치 첫사랑과 같은 기억으로 남는 시는 하나 있다. 바로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

 

 

즐거운 편지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길지 않은 문장으로도 장면을 그리며 또렷하게 필자의 감정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즐거운 편지>를 통해 처음 깨달았다.

 

원래 서간체를 선호하고, 창작물에서 활용되는 편지를 좋아하는 나이기에 이 시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여름, 어느 숲에서 바람을 느끼며 써내려간 연서 같기도 하고, 눈이 펑펑 내리는 날 밤에 모닥불 앞에서 읽고 싶은 한 권의 책 같기도 하다.

 

수많은 교과서와 참고서, 또는 다른 문인들에게 분석되었던 시지만 나는 이 시를 세세하게 해석하고 싶지 않다. 우리가 편지를 받아 읽을 때 그 안의 의미를 캐내지 않고 그저 감정을 전달받는 것처럼, '읽는' 것에 집중하고 싶다.

 

 

 

시가 알려준 삶



 

청혼

           서덕준


폭폭한 겨울냄새가 나는 네 무릎을 가만히 베고 누워

네가 읊조리는 음성의 실밥을 하나 둘 세면서

내 머리칼을 쓰다듬는 네 손가락을 타고 꿈에 빠져들고 싶어


복숭아 향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네 쇄골에 기대어

오늘은 자주색 양말을 신었다, 손톱에 작은 멍이 들었다는 둥

시답잖은 말이라도 조잘거리고 싶어


재봉틀처럼 뛰는 가슴에 내 목숨을 실로 삼아

네가 입을 옷 한 벌 지어주고 싶어


땅에 별이 뜨고 하늘에 강이 흐르는,

무화과에 꽃이 피고 다리 달린 인어가 사는 나라로

너와 함께 사라지고 싶어.

 

 

내가 오랜 시간 SNS에서 팔로우하며 응원했던 서덕준 시인의 시들도 하나같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보다 사랑한다는 표현의 고백이 있을까?

 

사랑한다는 말이 정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사랑의 표현을 아끼는 편은 아니지만, 시를 쓸 때면 어떻게 그 단어를 문자로 발음해야 하나 오랜 시간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사랑은 고민이 필요한 것이 아닌데, 내가 그를 보며 느끼는 감정들을 쏟아내면 그것이 결국 내 사랑을 설명하는 문장일 텐데.


결국 나는 또다시 시로 배운다. 모든 것을.

 

 


시의 고백


 

 

청혼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위에서 언급한 시와 동일한 제목이다.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시의 소재가 고백이나 청혼일 경우 제목부터 가슴이 뛰는 것 같다. 문학에서 감정의 진솔함이 가장 선명하게 묻어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는 나에게 매일 새로운 세계로 다가온다. 너무나도 바쁜 일상이고, 시집을 잠깐 펼칠 여유도 부족한 시간들을 보내는 중이지만 결국 지금의 내가 여기 닿기까지 시는 늘 곁에 있었다. 그러니 이제 나도 보답할 차례.

 

계속해서 읽어내고, 치열하게 쓰고, 또 나누어야겠다.

 

결국 그 문자 안에서 화합되는 것이 어쩌면 문학이 원하는 진정한 의미일 것이기에.

 

 

 

명함.jpg

 

 

[박시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9.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