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녀의 세계는 선명해진다 - 영화 '사랑의 탐구'

글 입력 2024.09.1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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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랑의 탐구'(2024)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로맨스코미디, 근데 이제….


 

사랑의 탐구. 영제로는 The Nature of Love. 사실 원제를 그대로 옮겨오면 사랑의 '본질' 정도가 되겠지만, 어느 쪽이든 꽤 무게감이 느껴지는 건 마찬가지다. 아무튼 두 가지 버전의 제목을 모두 고려해보면, 자연스레 영화의 핵심이 다음과 같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어렵고도 익숙한 사랑, 그 사랑의 본질이란 것을 한번 탐구해보겠다.

 

이런 무게감에는 약간의 결연함도 느껴져서, 상영 내내 사랑에 대한 철학적 논증이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우려스러울 수도 있다. 일단 나부터가 그랬다(그도 그럴 게, 예고편에서는 철학 강사인 소피아가 사랑에 대한 여러 철학자들의 주장을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탐구'의 사전적 정의를 생각하면 이런 추측은 더욱 짙어진다. 탐구: 진리, 학문 따위를 파고들어 깊이 연구 함. 다시 말해 영화는 세상을 구성하는 여러 가치들 중 '사랑'을 거대한 진리 및 학문적 성취와 비슷한 중요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셈이다.

 

하지만 예상 외로 시사회 현장에서는 몇 차례고 웃음이 터졌다. 시종일관 어려운 이야기를 줄줄 읊는 강연 같은 내용이 전혀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로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감상평을 한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이거 완전 로맨스코미디다. 근데 이제, 약간의 진지함을 곁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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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너무 다르고, 각자의 세계는 공고해지고


 

주인공 소피아에겐 오래된 파트너가 있다. 그의 이름은 자비에. 둘 모두 가방끈 꽤나 긴 사람들이다.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철학 수업에 출강하며 정식 교수 임용을 기다리는 소피아, 그리고 이미 교직에 몸 담고 있는 자비에. 주변의 친구들 역시 술 한잔 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각종 철학적 토론을 일삼을 정도로 문화 자본 두둑이 갖춘 이들이다. 살림을 합친 둘의 집에 자비에의 부모님이 별 예고 없이 방문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의 관계. 비슷한 지적 배경,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차곡히 쌓인 유대감과 편안함은 이 관계의 핵심이다.

 

하지만 편안함의 또 다른 이름은 지루함. 언젠가부터 권태를 느끼기 시작한 소피아에게 새로운 인연이 하나 나타난다. 그의 이름은 실뱅, 소피아와 자비에가 함께 구입한 별장의 리모델링을 맡은 인테리어 업자다. 조금 거친 말투와 육감적인 매력. 자비에와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기는 그에게 소피아는 급격히 빠져든다. 빳빳한 코트 대신 흐물한 캐주얼을 입고, 투박한 언어로 진심을 뱉는 남자. 소피아가 그동안 자비에와 이루고 있던 것이 '비슷해서 편한 관계'였다면, 실뱅과의 관계는 '달라서 자극적인' 순간의 연속이었다. 결국 소피아는 자비에와의 관계를 정리한다. 당신은 더 이상 연인이 아닌 친구에 불과한 것 같다는, 연인으로서는 그토록 날카로울 수가 없는 이별 선고와 함께.

 

그렇게 새로운 사랑 속에서 하루하루 생기 넘치던 소피아. 하지만 달라서 자극적인 관계는 곧 '달라서 삐걱거리는' 관계가 되어가기 시작한다. 실뱅은 소피아와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간극에 은근한 자격지심을 느끼고, 또 그런 차이는 사랑으로 충분히 무마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또 그것이 실뱅에게 매력을 느끼는 원인이기도 했던) 소피아마저 은연중에 실뱅을 자신처럼 '고치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그렇게 서로 날카로워졌다가,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일을 반복하는 소피아와 실뱅. 위태롭던 둘의 관계는 결국 소피아의 생일파티 날을 기점으로 끝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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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반대인 사람과의 에로스적 사랑과 꼭 닮은 사람과의 우정같은 사랑. 전개를 큼지막히 나눠보면 영화의 줄거리가 이런 대결적 구도로 정리되는 것도 같아 보인다. 두 가지 사랑을 대척점에 놓고 고민하는 주인공을 담아내는 건 어쩌면 진부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 구조다. 하지만 이 섬세한 영화를 앞에 두고 위와 같은 이분법적 독해에 그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이분법 아래에선 자칫하면 소피아가 맞이한 결말을 일종의 '징벌'로 곡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오랜 신뢰와 사랑을 저버리고, 육체적 욕망과 설렘을 쫓은 결과로 소피아가 두 사랑 모두를 '놓치고' 말았다는 식의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양자택일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사랑을 소재로 그 너머의 어떤 진실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본질에 관한 고찰은 결국 자연스레 사랑을 하는 '나'에 대한 탐구를 향하게 된다. 왜 이 사랑을 놓아주게 되는지, 왜 이 관계에서 만족할 수 없는지, 도저히 견뎌내지 못할 것 같은 특성들과 또 모든 마찰을 감수하고도 끝내 끌어안고 사랑하고 싶어지는 특성들은 무엇인지. 영화는 그런 철학적 여정을 로맨스의 언어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무엇으로 나의 세계를 채워나갈 것인가에 대한 부단한 선택의 과정.

 

실제로 소피아는 실뱅과의 만남, 자비에와의 헤어짐을 통해 많은 것을 알아간다. 플라토닉한 관계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친구와 달리 자신은 육체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중요한 편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남편과 매일같이 싸우면서도 금슬이 좋은 친구네 부부를 보며 자신에게는 새로움이 자극의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는 소피아(여담이지만 그 친구 역시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는 데 재미를 붙이기도 한다). 실뱅과의 갈등을 겪으면서는 자비에가 가져다주던 정신적인 충족감을 새삼 곱씹기도 한다.

 

이렇듯 소피아는 상대의 여러 특성들을 민감하게 잡아채고 반응하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세계를 더욱 선명히 그려나간다. 용인할 수 없는 차이, 포기하기 힘든 만족, 때로는 사랑스러움이 되는 결점, 때로는 결점이 되는 사랑스러움…. 그리고 무엇보다 소피아가 닿게 된 가장 귀중하고 절대적인 진리는, 결국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홀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실존적 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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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면 우리는 실뱅과 소피아가 너무 다르다는 점에 집중하게 된다. 그로 인해 실뱅이 줄 수 있는 것을 자비에는 줄 수 없고, 자비에가 줄 수 있는 것을 실뱅은 줄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물고 물리는 관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정신적인 만족을 준다고 생각했던 자비에도 때로는 소피아의 관심사와는 전혀 동떨어진 주제의 책을 선물하며 무심한 면모를 보이곤 했다. 또 소피아에게 사랑의 설렘을 오랜만에 일깨워준 실뱅은, 정말로 둘 사이의 사랑을 당장 확인하는 일에만 치중해 오히려 그 설렘을 퇴색시키고 소피아의 머리를 차갑게 만들어 버렸다.

 

결국 중요한 건, 한 사람의 다양한 면모는 결코 온오프식 스위치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때로는 뜨거운 실뱅과 비슷하고, 또 때로는 지적인 자비에와 비슷한 소피아는 모두 그녀 자신으로서 동시에 존재한다. 상대 역시 마찬가지다. 담백해 보이기만 하던 자비에가 소피아를 욕망하기도 하고, 생활의 관록을 체화한 실뱅이 실질적 지성을 갖추기도 한 것처럼. 따라서 어떤 관계를 선택하든, 상대가 나와 완전히 같거나 비슷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이점 같은 것은 없다. 우리 모두는 무조건적으로 절대 '다른' 존재이므로.

 

유일무이하다는 것. 그것은 외롭고도 존귀한 절대성이다. 이는 소피아가 사랑의 격동을 몇 번이고 겪고 나서야 겨우 도달한 자각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어떤 사랑도 우리가 그리는 이상적인 사랑에 부합할 수 없다는 허무한 메시지, 혹은 완벽함에 대한 추구와 필연적 실패에 대한 비관으로 요약하고 싶지도 않다. 이것은 한 사람이 자신을 진정으로 마주하는 일의 외로움, 그 고단한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게 영화의 마지막 씬을 떠올려본다. 이 머리 아픈 로맨스의 말미를 장식하는 것은 바로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밤 한가운데 홀로 남겨진 소피아의 모습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주위처럼 모든 것이 막막한 가운데 가장 확실한 사실은 하나뿐이다. 어떤 종류의 사랑에 몸을 담갔든, 그녀는 지금 이 땅 위에 오롯이 발 딛고 있다는 것. 어쩌면 모든 사랑의 본질은 그런 스스로의 '혼자 됨'을 받아들이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막이 내릴 때까지, 소피아는 입김이 서리고 코끝이 절로 빨개지는 추위를 가만히 느끼며 서 있는다. 살갗에 닿는 추위처럼 씁쓸하고 선명한 그 사실을, 자신의 온몸으로 감각하겠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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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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