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떻게 죽음까지 사랑하겠어,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거지 [도서]

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걷는나무, 2018)
글 입력 2024.09.12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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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격언은 삶의 어느 부분에서나 접붙일 수 있는 말이다. 삶에서 만연한 고통을 (미세하게나마) 경감시켰던 즐거움의 경험론이 우리에게 작은 희망을 주기도 하는 것. 다만 그 격언은, 적어도 ‘삶’의 영역 안에서만 적용될 뿐이다. 만약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죽음’이라면, 우리는 그 죽음을 인정하느라 급급해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즐기기라도 해야 한다는 당위조차 망각해버릴 테다.


인간은 죽는다. 모든 인간 앞에 동등하게 필연적인 이 명제는 삶의 영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나의 죽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통증이 되고, 내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남겨진 나의 고통이 된다. 삶 속에서 죽음의 고통을 생각하는 일은 전혀 달갑지 않기에 죽음은 철저히 외면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순간으로 찾아온다. 잊고 있던 죽음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몰고 오는 일차적 반응은 슬픔뿐이다. 당연한 죽음 앞에서 당면한 슬픔을 맞이하는 방법, 우리는 그 어려운 작업을 애도라고 부른다. 그 작업의 마감기한은 아마도 무한대이다.


롤랑 바르트의 에세이 『애도 일기』(걷는나무, 2018)를 읽는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가족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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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는 사랑하는 그녀의 어머니(그가 ‘마망’이라고 부르던) 앙리에트 벵제의 죽음 이후 단상을 담은 일기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절대적인 사랑의 존재였던 어머니를 잃고 깊은 슬픔에 빠진 채 긴 애도를 시작하는 그에게 주변의 위로는 큰 도움이 될 수 없었을 것. 타인의 위로는 필연적으로 어설플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이 직접 당한 슬픔의 타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측정한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별로 반갑지 않은 위안들. 애도는, 우울은, 병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은 나를 무엇으로부터 낫게 하려는 걸까? 어떤 상태로, 어떤 삶으로 나를 다시 데려가려는 걸까? 애도가 하나의 작업이라면, 애도 작업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속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도덕적 존재, 아주 귀중해진 주체다. - 10. 27.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마주한 나의 슬픔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죽음이 남긴 거대한 슬픔을 떠안기 위해서는 누구나 “도덕적 존재, 아주 귀중해진 주체”가 되어야 한다. 슬픔에 무너지지 않고 여전히 귀한 사람으로 남으려는 노력. 이것은 남겨진 이들에게 부여되는 마지막 책임이기도 하다. 만약 그 막중한 책임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는 첫 번째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가족이다.


-

당신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달려간 우리는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는 당신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허겁지겁 당신의 손을 붙잡고, 팔다리를 쓰다듬고, ‘고모, 고모, 저희 왔어요. 너무 늦어서 죄송해요.’ 소란스럽게 불러대도 당신은 아주 잠깐 눈을 떴다가 감을 뿐이었습니다. 힘겹게 열린 당신의 눈동자에 우리가 얼룩처럼 비칠 때마다 당신의 꿈속에 우리가 있기를 바랐습니다. 당신이 지금 꾸고 있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만큼 끝없이 이어지고 있을 그 긴 꿈속에 우리의 모습이 보였길 바랐습니다.

그날 당신은 어떤 꿈을 꾸고 있었을까요. 아주 평화로운 꿈이었는지 당신은 아주 긴 주기로, 아주 약한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그 조용한 공기 속에서 우리는 울었습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수도 없이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어요. 당신은 그런 울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거예요. 당신은 다 괜찮다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하면서 오히려 우리를 위로했겠죠. 몹쓸 병을 선고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당신을 만났을 때 당신은 덤덤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으니까요.

울지 마. 나 괜찮아. 나 살 거 같아.


누군가의 죽음이 더욱 슬퍼지는 때는 떠난 이와 남겨진 우리가 끝내 하나가 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정말로 당신을 사랑했지만 “함께 (동시에) 죽지 못했다”는, 우리가 철저히 분리된 존재라는 자각에 도달하는 순간 우리는 죽음을 실감하며 무너지고 마는 것. 바르트는 슬픔 속에 머물면서도 그럭저럭 일상을 꾸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갑자기 아프게 찌르고 들어오는 슬픔”을 느꼈음을 고백한다.


 
나는 아직도 ‘더 많이 망가져 있지 못하다’라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괴로움. - 11. 21.
 


당신의 죽음은 나에게 커다란 슬픔이다. 그러나 나의 슬픔과는 별개로, 또 당신의 존재와는 무관하게, 나의 일상은 점차 제자리로 돌아온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그 사람 없이도 잘 살아간다면, 그건 우리가 그 사람을, 자기가 믿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까…?” 죽을 만큼 슬프지만 죽을 수는 없는 우리. 나는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보다는 자책감이 찾아오는 시간.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바르트의 저 공허한 문장 속에 남겨진 자의 고통은 터무니없을 만큼 슬프게 다가온다.


 
나는 슬픔 속에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슬퍼하는 것이다. -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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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동생은 비쩍 마른 당신의 얼굴을 자꾸만 쓰다듬으면서 당신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습니다. 엄마랑 같이 놀러가고 싶어. 매일 밤 같이 얘기하고 싶어. 엄마 없으면 나 어떻게 살아. 나 엄마 없으면 못 살아.

그건 당신을 따라 죽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살겠다는 어리광이었습니다. 당신이 없다면 나의 삶도 없을 거라는, 그러니까 제발 조금 더 살아달라는 가여운 위협 같은 것. 삶의 일부를 도려내는 것만 같은, 영원한 이별의 아픔은 죽음의 언어로만 당신에게 겨우 가닿을 수 있었을 테니까요.


누군가는 쉽게 말한다.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죽음은 필연이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러니 너무 오래 슬퍼하지 말라고. 너무 정확한 위로의 말들은 오히려 고통이 되기도 한다. 슬픔은 “결국 시간의 흐름을 따르고, 변증법적으로 느슨해지고, 조금씩 사라지면서, 마침내 ‘화해에 이른다.’ 하지만” 어떤 슬픔은 결코 “물러가지 않는다”. 어떤 슬픔은, 예컨대 사랑하는 당신을 잃은 후 새겨진 슬픔은 마음 한구석에 “일말의 움직임도 없는 정지 상태”로 영원히 머물다가, 어느 날 어느 순간 불쑥 얼굴을 내민다. 슬픔의 유통기한과 타협하지 않는 슬픔도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를 잃어본 자만이 깨닫는 서글픈 지혜다. 그 지혜를 얻고 단단해지는 순간을 우리는 ‘성숙’이라는 단어로 바꿔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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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을 치르는 내내 울음을 목격했습니다. 엄마를 떠나보내는 사촌들의 눈두덩은 종일 퉁퉁 부어서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손님들이 한차례 빠져나가 한적해진 시간에 구석에서 울고, 먼저 울어주는 조문객의 포옹에 다시 울고, 이른 새벽 불이 꺼진 빈소에서 영정을 보며 울었습니다. 나는 사람이 그렇게 오래, 길게, 계속해서 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위로의 말은 위로가 될 수 없었고, 격려의 말은 격려가 될 수 없었을 테니까요. 깨끗하게 방명록을 정리했고, 조문객이 벗어둔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했고, 영정 앞에서 자주 짧은 기도를 했습니다. 발인 날에는 온 신경을 곤두세워 조심스레 영정 사진을 들었습니다. 잘 보내드리고 있는 게 맞는지 자꾸 헷갈려서 미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면 슬픔보다는 침울, 그게 더 정확한 이름이었겠죠.

장례가 끝나고 상복을 채 벗지 못한 사촌들과 작별의 포옹을 했습니다. 정말 고마웠다고, 덕분에 잘 보내드렸다고, 다시 붉게 물든 얼굴로 그들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해도 죽음마저 사랑할 순 없다. 죽음 앞에서까지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죽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일. 그 지난한 과정을 각자의 방식으로 이어가는 일. 그것이 애도라는 작업의 본질이다. 그 작업에 필요하다면 우리는 “유물론은 진리이지만 그러나 그 진리는 또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라 믿으며 영혼의 세계에 기대볼 수도, “잘 측정된 거리를 두고 멀리 떨어져” 지낼 수도, “혼자 있음이 허락되지 않는 세상에서 벗어나 있”을 수도 있다. 바르트는 자신의 방식(예컨대 글쓰기)을 통해 장장 2년에 걸쳐 애도의 작업을 완수했다. 그 작업을 마친 후 그는, 마치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처럼, 사랑하는 이의 곁으로 떠났다.


 
애도의 슬픔을 (비참한 마음을) 억지로 누르려 하지 말 것(가장 어리석은 건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이 없어질 거라는 생각이다), 그것들을 바꾸고 변형시킬 것, 즉 그것들을 정지 상태(정체, 막힘, 똑같은 것의 반복적인 회귀)에서 유동적인 상태로 유도해서 옮겨갈 것. - 1978. 6. 13.
 

 

죽음은 맞이할 준비를 단단히 끝낸 후에도 어쩔 수 없는 슬픔으로 찾아온다. 죽음도 슬픔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빠르게 무너지고, 슬퍼하고, 인정하고, 다시 슬퍼지길 반복하는 것뿐.


그리고 언젠가, 그 오랜 반복 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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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속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요. 금세 돌아갈 사람도 있을 거고, 조금 천천히 돌아가야 할 사람도 있을 거예요. 게으르다고 혼내지는 말아주세요.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당신과 작별하고 있으니까요. 각자의 작별이 끝난 어느 좋은 날에, 그땐 늦지 않게 뵈러 갈게요. 고모, 좋은 곳에서 푹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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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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