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아끼는 삶에 관하여

절약의 효능
글 입력 2024.09.12 16:3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20240912163413_ovdswgox.jpg

 


얼마 전 그 옷만 입으면 “혹시 직업군인이세요”라고들 묻던 국방색 잠바가 찢어졌다. 올해로 7년 차인 애국 잠바를 입고 나는 인천에서 서울에서 경기에서 경남에서 충북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그래서 애착이 간다면 거짓말이고. 이 옷이 가장 부담 없다. 새 잠바를 사자니, 패션은 어울리게 중간만 가자는 내 신조치고는 이것 참 가격들이 너무들 하다. 쇼핑몰을 터덜터덜 걷다 그냥 돌아와 수선집에 갔다. 단돈 7,000원에 애국 잠바는 수명연장에 성공했다.


것처럼 옷은 찢어질 때까지 입고. 신발은 밑창 떨어질 때까지 신고. 가방은 끈 떨어질 때까지 멘다. 아껴야 한다. 아껴야 산다. 아껴야 버틸 수 있다.


아낀다는 건, 버티는 것과 같다. 버틴다는 건, 최소한을 지키는 것과 같다. 최소한을 지켜야 최대한이던 최선이던 열심이던을 지킬 수 있다. 제아무리 열정 넘쳐도 쌀 없으면 굶어 죽고, 월세 밀리면 얼어 죽는다. 요컨대 아낀다는 건, 최소한을 지킨다는 건. 버티는 삶을 위한 초석이다. 선결과제다.


아낀다는 말이 주는 찌질한 어감이, 아끼는 삶을 터부시 만든다. 아침이면, 응당 마셔야 할 프랜차이즈 커피와 은근슬쩍 보이는 브랜드 속옷. 1년에 한 번은 의무적으로 떠나는 호캉스와 남는 건 사진이라며, 맛 모르고 멋만 아는 외제 주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같은 아침을 꿈꾸고, <위대한 개츠비> 같은 저녁을 그린다. 아끼는 삶은 대개 그렇게 터부시되기 마련이다. 아끼는 삶에 없는 화려함이 사람을 홀린다.


아낀다는 것이, 그래서 말처럼 쉽지 않다. 최신형 휴대폰과 대형 자동차를 제기능 때문에 소비하는, 소비자가 몇이나 될까. 허영과 허세, 질투와 눈치가 농후한 소비가 대개다. 유년 시절, 최신형 장난감이 가득한 부잣집에서 체험한 부러움을, 비참함을, 덧없음을. 다 큰 성인들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다. 땡깡 부릴 필요 없이 카드를 꺼내지만, 감정적 소비는 결국 땡깡에 불과하다.


한정된 자금은 선택과 집중을 하는 거라고,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알려준다. 반드시 필요한 것과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몇 가지를 선별해야 한다. 오버스펙을 검열하고 허례허식을 줄여야 한다. 오버스펙과 허례허식에 돈 쓰다가는 나만 그지 된다. 그거 아껴서 뭐 하냐는 비아냥에 속지 마라. 걔들은 믿는 구석이 있다.


오버스펙을 검열하고 허례허식을 줄이는 데는 몇 가지 필요조건이 있다. 아끼는 삶은 필요조건이 충족되어야 지속할 수 있다.


첫째로, 낙관이 필요하다. 낙관한다는 건, 강박적인 긍정적 사고와 다르다. 부러 짓는 웃음은 어차피 오래가지 못한다. 그건 연기지 낙관이 아니다. 아낌으로써 얻게 될 이득과 지키고 버틸 수 있게 될 미래에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 고급의 가치만큼 보급의 가치 또한 깨달을 줄 알아야 한다. 내게 꼭 필요한 만큼을 계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반가워할 줄 알아야 한다. 아끼는 삶을 비참히 여기지 않고, 낙관함으로써 기뻐하고 깨닫고 반가워할 줄 알아야 한다.


둘째로, 자기객관화가 필요하다. 본인의 현재 상황을 객관화함으로써. 쉽게 말해, 자기 분수를 암으로써. 사치와 검소와 궁상을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 아끼는 삶을 선택하면서도 지지리 궁상을 피할 수 있고. 일확천금을 바라는 우매한 공상을 제거할 수 있다. 욕심과 현실을 분간하고 우매보다 영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래서 아껴야 할 곳과 아끼지 말아야 할 곳을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


셋째로, 목적이 필요하다. 티끌 모아 만들고 싶은 태산이 있어야 한다. 목적은 곧 동기이고, 동기는 아끼는 삶이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도록 지탱해 준다. 한정된 자원을 보다 가치 있는 곳으로 배분하겠다는 목적이 필요하다. 작게는 이번 주에 아낀 커피값으로, 여자친구와 점심식사 때 사이드 메뉴 하나 추가한다던지. 크게는 수십 년간 아낀 술담배값으로 조금 더 큰 집을 얻겠다던지. 인간은 동기가 있어야 몸이 움직인다.


내 애국 잠바에는 부담 없는 맛이 있다. 닳디닳은 신발 밑창과 끈 떨어진 가방에는 열심히 일했다는 흔적이 있다. 수선집을 적극 이용하면 옷을 오래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갑다. 오버스펙을 검열하고 허례허식을 줄인 덕에, 자금난에 허덕이지 않아 기쁘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여자친구 선물 사줄 생각에 신난다. 얼마 전 끊은 담배값을 티끌 모아 조금 더 큰 오피스텔을 얻겠다는 다짐이, 희망차다. 낙관하며 아끼고, 객관화하며 아끼고, 목적 있이 아껴 최소한과 최대한과 최선과 열심을 지키겠다. 아낀 만큼 더 오래 버티어 보겠다.


내게 아끼는 삶은 찌질한 어감이 아니다. 아끼는 삶을 선택한 것이 다행이고 기쁘고 반갑고 희망차다.

 

 

[윤제경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9.1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