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경로에서 이탈해 보기 [사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과정은 필요하다.
글 입력 2024.09.13 22:04
댓글 1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몇 년 전, 어느 여름 방학에 도예를 배웠었다. 대학생의 여름방학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가 주어지는 그 제한적인 기간에 나는 흙을 만지며 물레를 돌렸다.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은 점토의 모양을 본격적으로 잡기에 앞서, 긴 가래떡처럼 뽑아져 나온 점토 덩어리를 물레에 붙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중간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두 손으로 최대한 둥글게 다듬어 반구의 형태를 띠도록 만든다. 그러고는 적절한 양의 물과 압력, 약간의 스킬을 들여 원하는 모양으로 조금씩 바꾸어 나간다. 투박한 흙덩어리는 개인의 손을 거치며 개성을 투영한 작품으로 이어졌다. 사람에 따라 쓰임새와 생김새가 달라지는 점토는 큰 대접이 되었다가 화병으로 변했으며 가끔은 물컵이 되기도 했다.

 

 

[크기변환]KakaoTalk_20240913_224808591.jpg
수업에서 만들었던 도자기들.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차갑고 촉촉한 흙을 어루만지는 시간은 이유 모를 여유로움을 안겨주었다. 무언가에 온전하게 집중하자 곧이어 잡생각이 사라졌고, 편안하게 사유할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이어졌다. 평소와 같이 흙을 다듬으며 이번엔 무엇을 만들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지나가던 대화 도중 도예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유진 씨, 아직 대학생이고 어리잖아요. 저는 유진 씨가 한 번쯤 휴학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그 기간동안 경험의 폭이 넓어지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돼요.” 에어컨 바람을 타고 가볍게 스쳐 지나간 대화는 시간을 거치며 무게를 더했고, 이후 나는 진짜로 휴학을 했다.

 

 

 

휴학에 앞서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자 동시에 취업 시장에서 말하는 1년간의 공백기를 가지기 시작하면서 이정표로 삼은 한 가지의 모토가 있었다.

 

“수치로 매겨질 수 없는 것들에 관심을 두자. 시야를 넓히는 시간을 가지자.”

 

나는 이 바람을 가슴속에 깊이 새기고 견고히 여기며 1년을 보내게 된다. 최대한 많은 것에 관심을 두고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시간 들도 분명히 있었다. 휴학을 하고 난 직후에는 잠시 길을 잃고 방황했었다. 학교라는 교육체계에 발을 들이고 지금까지 정해진 루트와 경로대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나아갈 방향을 잡아주던 최소한의 압력조차 사라져 버리자, 해방감에 자유로움을 느끼기보단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함이 들었다. 쉴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에서 홀로 정체된 것만 같은 느낌에 끊임없이 우울해지곤 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달려가던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우뚝 서보자. 발끝만을 바라보던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자. 그러면 난생처음으로 전경이라는 것이 보인다. 탁 트인 시야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나는 그 광활한 세계에서 처음으로 내 속도에 맞추어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묵혀둔 것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다


 

내일이 정해지지 않은 오늘을 보내다 보면 점차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하루에 대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몰랐던 내 취향으로 시간을 가득 채워가며 자신을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게 된다. 나라는 사람은 누구인지, 나는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에 열정을 보이는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가령 잠은 몇 시간을 자야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지 등등. 바쁘게 살아갔기에 쉽게 놓쳐버렸던 나에 대한 소소한 정보 값을 파악할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미뤄두었던 것들은 재개할 수 있는 일종의 기회로 다가왔다. 여러 핑계를 들어 애써 묵혀두었던 것들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앞장서서 제대로 맞서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가슴 속에서 응어리져 있었던 드럼에 대한 열정을 꺼내어 다시 드럼 채를 잡았고, 글쓰기에 대한 추상적인 의욕을 이번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활동으로 구체화했다. 지금까지 단기적으로 시작과 관둠을 반복했던 수영을 1년간 꾸준하게 이어 나가기도 하고, 매일 크로키를 한 장씩 그리며 생각만 해왔던 그림 스터디를 실행에 옮겼다.


그러다 보니 깨닫는 것이 하나 있었다. 가끔은 깊게 생각하기보다는 우선 행동에 옮겨보아야 한다. 지레 겁을 먹고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적인 형태를 훑어내리며 부정적인 생각으로 머리를 마비시키는 것보다 일단 몸을 움직이고 직접 부딪혀 보는 것이 낫다. 이 단순한 원칙을 깨닫기까지 나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자꾸만 스스로를 구렁텅이로 끌고 내려가려는 걱정들로 도전 자체를 두려워했다. 물론 도전이 재밌어졌다거나 아예 무서워하지 않는 그런 극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문턱을 낮출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에 도전하다 보면 늘 좋은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 제한된 기회에 많은 사람들이 몰리다 보면 낙오자가 있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내가 소외되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늘 좋은 결과만이 따라올 수 없다는 현실에 쉽게 상처받곤 했다. 그렇기에 더욱 도전에 부진했던 것 같다. 어차피 안 될 것 같으니까, 도전해 보았자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실패로 좌절했음에도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서는 방법을 터득해 나간다. 비록 재빠르게 준비 자세를 취해서 다시 달리기를 이어 나갈 방법까지는 체득하지 못했다. 아직까진 실패에서 오는 실망감이 아프고 힘들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덜 다칠 수 있는지, 안전하게 일어나는지를 터득했다는 것이다.

 

 

[크기변환]KakaoTalk_20240913_223529711.jpg
올해 초부터 드럼을 다시 시작했다.

 

 


일기의 효능


 

이전에는 일기를 잘 쓰지 않았다. 아무리 짧은 분량이더라도 무언가를 써낸다는 것 자체가 귀찮기도 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 하루였을 경우 다시 회고하는 것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한번 손을 놓기 시작하면 아예 내 품을 떠나가 버린 느낌이 들어 일기장으로부터 아예 손을 놓아버리곤 했다. 어차피 하루를 살아가는 주체가 나라는 것은 변하지 않을 테고,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는 자신에게도 어떠한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단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휴학을 한 이후로는 최대한 일기를 자주 쓰려고 노력한다. 정확히는 기록을 생활화하기 시작했다. 1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는 만큼 무한대의 자유가 생긴 것만 같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 시간이 어떻게 쓰이냐는 개인의 노력과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며 불변성을 지닐 수도 있고, 하루하루가 다른 모습을 띨 수도 있다. 대체로는 생계와 학업을 위한 루틴이 형성되어 되풀이되지만 말이다.

 

나에게는 그렇게 똑같이 지나가는 나날들에 지치지 않으려면 기록이 필수가 되었다. 어제와는 달라진 나를 증명하고 싶었다. 그렇게 변화를 입증하려는 버둥거림으로부터 무언가를 끄적이다 보니 조금씩 변해가는 자신을 자각할 수 있었다. 준비하고 있는 것에서 비롯된 기술적인 능숙함이나, 당시 심각하게 다뤄졌지만 지나고 보니 별거 아니었던 일들, 그리고 무언가에 대한 생각이나 가치관까지도. 그렇게 하루하루 달라져 있는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내일의 나는, 내년의 나는, 10년 뒤의 나는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을까.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남은 것은


 

휴학 생활에서 만족스러운 면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대학생이 취업 준비 계획을 세우고 휴학하는 것처럼 스펙을 쌓는 것에 집중해야 했나, 라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보다 일찍 사회 경험을 가지고 매번 시험을 보며 자기소개서의 한 줄로 채워질 것들을 만들어내야 했을까, 라는 회고가 남기도 한다.

 

하지만 그랬더라면 개인적으로 손에 쥔 것들보다 놓친 것들이 많았을 것 같다. 적어도 지나간 시간에 후회는 남지 않는다. 늘 현재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 3자가 보기에 제자리에 머물러있는 시간일지 몰라도, 나는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얻은 것들이 분명히 있다. 그렇게 알게 된 것들을 바탕으로 이제는 내 속도에 맞춰 걸어가 보려고 한다.


다시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으로 돌아온 이 시점에서 느끼는 것이 있다. 휴학이라는 기간은 캄캄한 바다를 혼자 항해하는 것과 같다. 지금까지는 누군가가 어깨 너머로 방향을 알려주었거나 귓속말로 지름길을 속삭여 주었다면, 휴학을 선언한 이후로는 홀로 조종대를 잡아야 한다. 어느 쪽을 향해도 괜찮다는 자유가 보장된다. 방향에 있어서 옳거나 옳지 않은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크기변환]moon-2762111_1280.jpg

 

 

그렇게 어디론가 가다 보면 가끔은 예상치 못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방향 감각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평소에 잘 읽히던 별자리가 보이지 않아서 헷갈릴 수도 있고, 이따금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뱃멀미를 심하게 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 항해하는 법을 익힌다. 학생이라는 안정된 신분과 뭘 해도 타당하게 납득될 수 있는 유예 기간을 통해 인생이라는 드넓은 바다를 헤쳐 나가는 법에 대해 배운다. 그 시간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가에 따라 저마다의 의미로 남는다.


휴학을 해보니 지난 시간에 왜 도예 선생님이 추천했는지 알 것만 같다.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보면 더 많은 것이 보인다. 그동안 놓치고 살았던 것이 눈에 들어온다. 있는지도 몰랐던 존재가 내 삶에서 가치를 더해가는 것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견식을 높여나간다. 아직 많이 남은 인생을 만족스럽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찾아야만 한다. 이 단순한 요구 조건을 위해 필요한 것은 "경로에서 벗어나는 용기" 뿐이다.

 

 

 

조유진.jpg

 

 

[조유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1
  •  
  • 구운양파아몬드
    •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 ㅎㅎ
      휴학기 동안 경험하신 모든 것들이 좋은 영향이 되어 현재와 미래의 나에게 닿길 바라겠습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다시 시작된 학업을 비롯한 바쁜 일상도 파이팅입니다! 오늘도 잘 봤습니다:)
    • 1 0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9.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