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걸어온 길을 따라, 나아갈 길을 향해 - 오슬로에서 온 남자 [공연]

무관심 속에 감춰진 만남들을 마주하며
글 입력 2024.09.13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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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몇 개가 놓인 빈 무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과정을 반추하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온 두 남녀는 의도치 않게 동행이 되어 길 위에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해 왔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묻고 답하며 풀어놓는 길 위의 여정은 지난할 정도로 잔잔하면서도 그 안에 소소한 감성들과 사건들이 꽉 들어차 눈앞에 그려진다. 이래서 길을 떠나는 것이 자주 ‘인생’에 비유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연극 <오슬로에서 온 남자>(박상현 작, 연출)은 2022년 11월 이후 약 2년 만에 다시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났다. 정체성과 공동체에서의 소외에 관한 주제를 일상적인 톤으로 가까운 우리 역사 속에 무심한 듯 섬세하게 녹여내는 것이 특징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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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두 남녀가 대화를 통해 산티아고 순례길의 여정에서 벨기에로 입양된 한국인의 양아버지를 만난 경험을 떠올리는 <사리아에서 있던 일>을 시작으로 등장인물과 배경이 서로 다른 다섯 가지 에피소드를 연달아 펼쳐낸다. 소외된 이들이 한 데 섞여 만든 이국적 동네 해방촌에서도 소속되지 못했던 인생을 이야기하는 <해방촌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땅을 계기로 한 데 모여 과거를 회상하던 형제들이 미군 부대를 전전하던 아버지와 부모 없이 시설에 맡겨진 아이들을 떠올리게 되는 <노량진-흔적>, 노르웨이에서 한국으로 생모를 찾으러 온 입양아 욘에 대한 연극을 연습하는 과정을 그린 <오슬로에서 온 남자>, 그리고 부대찌개의 근본에 대한 다툼에서 시작해 베트남인 어머니를 둔 띠하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용기 있게 고백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의정부 부대찌개>가 그것이다.

 

그 중 첫 에피소드 <사리아에서 있던 일>은 작품 전반의 궤뚫는 형식과 주제를 한눈에 제시하는 효과적인 오프닝의 역할을 한다. 서로 다른 에피소드들은 서로 분리된 듯 이어지기를 반복하는데, 순례길을 걷던 남자와 여자가 서로 헤어진 듯 다시 만나던 그 유동적 거리감이 에피소드들의 흐름에 감각적으로 스며있다. 작품은 에피소드마다 특정 인물 또는 가정의 일상 속 작은 한 부분을 짚어 내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데 공을 들인다. 시간의 생략이나 왜곡 없이, 공연 중 상황이 진행되는 데 걸리는 시간과 관객이 공연을 보는 데 걸리는 시간이 일치되어 각 장면이 더더욱 무대 밖 특정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단면을 그대로 가져온 듯 살아있게 느껴진다.

 

작품은 극대화된 구체성과 사실성을 가진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하나의 교훈 또는 메시지로 묶어내려는 의도를 앞세우지 않는다. 그러다 무심하게 ‘Shame on you’와 같이 타 에피소드에 등장한 대사를 일부 반복하거나 타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인물 또는 지명을 다시 언급하고, 타 에피소드에 출연했던 배우가 다른 역할로 재등장하도록 한다. 작품은 앞선 에피소드와의 관계성을 잊을 때쯤 그 연결고리를 언급함으로써 관객의 허를 찌른다. 각각이 분리된 듯 했지만 알고 보면 이어져 있는 극의 구성은 그 자체로 상관없는 먼 이야기인 줄 알았던 소외된 이들의 삶이 우리의 일상에 항상 스며들어 연결되어 있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첫 에피소드에서 제시된 한국에서 입양된 ‘딸’의 존재가 <오슬로에서 온 남자>에서는 공통된 경험을 가진 ‘아들’로 제시되는 등 반복 속에서의 의도적인 불일치가 눈에 띄는데, 이 모호함은 이야기가 포괄하는 대상이 비단 특정 인물 한 명이 아니며, 비슷한 소외를 겪는 수 많은 대상이 세상에 존재함을 강조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강조하며 사회를 넓게 돌아보게 한다.

 

작품에서는 첫 에피소드의 배경이 순례길이었던 것을 시작으로 에피소드마다 ‘길’이라는 소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해방촌에서도, 아버지와 함께 살던 흔적을 따라가 본 노량진에서도, 길은 건물과 마을이 새로 개발되었음에도 옛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극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살아온 길’을 걷는다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오슬로에서 온 욘이 걷는 길의 양상은 조금 다르다. 한국에서 친모의 행적을 찾아 걷는 길들은, 그가 살아 온 과거의 일부였으나 인지하지 못했던 길이다. 그는 그의 과거의 길을 새로이 발견하고 걸어보는 것이다. 작품에서 인물들이 걷는 ‘길’의 의미가 발전하는 과정은 관객들에게 과거를 반추하며 새로운 요인을 발견하는 과정을 제안한다. 인물과 관객이 그 과정에서 발견하는 것은 무관심 속 몰라보았던, ‘어디에나 있던’ 소외된 자들이며, 그렇게 느끼는 것은 ‘Shame’ on you, 즉 부끄러움이다. 하지만 작품은 그 끝에 희망을 내포한다. 극의 첫 장면, 길의 은유의 시초는 ‘순례길’이다. ‘순례’라 함은, 과거 종교의 ‘발생지’ 또는 ‘성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발견하고, 반성하는 모든 길은 결국은 공존의 성지로 향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마지막 에피소드에 드러나는 띠하의 이야기는 극에 구체적인 희망을 더한다. 띠하는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한국에서 태어났기에 본래 한국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자신을 어머니의 이름인 ‘띠하’로 부르기로 선택한다. 또한, 남쪽에 있는 베트남에서 왔으니 자신에게 어머니의 고향인 하이퐁을 본관으로 하는 ‘남’씨 성을 붙인다. 그러면 어머니의 삶을 자신이 이어서 살고 있는 생각이 든다면서. 그리고 오갈 곳 없는 자신을 거둬 준 다정한 부대찌개 집 할머니를 자신의 조상으로 삼기를 주체적으로 택한다. 자신의 역사를 새로 정의하고 새 시선으로 이어가는 용기가 띠하에게서 나온다. 돌아봄의 과정을 통해 새로 발견한 역사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새로 정의함으로써, 새로 변화된 삶을 이어갈 가능성이 있음을, 용기를 내서 그 가능성을 취하는 것이 남아 있음을 극은 관객에게 말한다.

 

작품 내에는 다섯 개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왜 작품의 제목이 그 중 <오슬로에서 온 남자>가 되었을지 생각해 본다. ‘오슬로’라는 먼 지역에서 온 우리와 같은 외모를 가진 남자의 이미지를 통해 어디에도 우리가 무관심해도 좋을 고립된 이야기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걸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오슬로에서 온 남자>는 연극에 대한 이야기이다. 입양된 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연출이 끼어들어 장면이 연극임을 꾸준히 알려주는 연습의 과정이다. 작품 연습에서 한국에서 나고 자란 연출과 한 명의 배우가 깨닫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입장은 단순히 한 방향으로 납작하게 정의될 수 없으며, 무대에서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에피소드의 마지막에 배우들은 욘에 관한 연극의 대사가 아닌. 진짜 욘이 남긴 편지를 낭송하며 당사자가 소외된 재현의 한계를 드러낸다. <오슬로에서 온 남자> 속 연극이나, 대학로 예술극장에 지금 올라가는 작품이나 사실 다를 게 없을지 모른다. 무대에 펼쳐지는 한국 땅의 사실적인 일상들과 오슬로라는 낯선 지명의 차이는, 관객에게 무대에 올라오는 것이 전부일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 주며 관객이 극장을 나가 직접 스스로의 순례의 길을 걸어 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오슬로에서 온 남자>는 관객에게 우리가 걸어 온 길을 되돌아 봄으로써 곧 우리가 걸어갈 길을 찾게 만드는 소중한 기회를 전달했을 것이다.

 

 

[박보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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