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느 가족 - 어느 가족의 따뜻함과 차가움 [영화]

글 입력 2024.09.15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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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족>을 본 관객 대부분은 영화 속 가족들을 보며 감동하고, 탄식을 내뱉었으리라 생각한다. <어느 가족>이 관객으로 하여금 울컥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뜨거운 감정 뒤, 어딘가 씁쓸하고 차가운 느낌이 여운을 남긴다. 그렇다면 <어느 가족>을 보고 난 후 느껴지는 이 감정은 무엇 때문일지 집중해 보자.


<어느 가족>의 원제는 <만비키 가족>(万引き家族), ‘훔치기 가족’, 혹은 ‘도둑질 가족’이다. 제목과 같이 이들은 물건을 훔쳐 생필품을 해결하거나 유리를 데려와 결론적으론 유괴로 성립되는 행동을 하는 등 ‘훔침’의 행위를 중심으로 하여 가족 공동체를 유지한다.

 

훔치지 않으면 당장 먹을 것이 없고, 씻을 수도 없으며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들이 이토록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를 해가며 살아가는 것은 훔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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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족>의 가족들은 피로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함께 살아가는 대안 가족의 형태를 띠고 있다. 물론, 이들이 처음 뭉치게 된 계기는 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회적 약자들이 경제, 생활, 여가를 함께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연대’로 보이기도 하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이 가족 구성원 모두의 전사를 구체적으로 알 순 없지만,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이들의 전사를 유추할 수 있는 대사가 등장한다. (영화의 시점에서) 현재 이들은 적은 생활비로 여생을 연명해야만 하는 노인, 일용직 노동자, 공장 단기 계약직, 성매매 종사자, 학대 혹은 방치당한 아이들로 정의 내릴 수 있다.


물론 모두가 이들처럼 절도를 택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들 한 명, 한 명의 삶이 사회의 사각지대로 몰리는 동안 사회는 진정 어떠한 조치를 할 순 없었던 것인지 의문스럽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매뉴얼대로 일을 처리하고자 한다면 매뉴얼이란 울타리 바깥에 속한 이들은 또다시 복지의 사각지대로 밀려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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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무와 노부요는 가족 구성원 내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아이인 쇼타와 유리를 대하는 모든 행동에는 친부모라고 해도 될 만큼의 사랑이 가득 담겨있다. 하지만 이들은 부모가 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유리를 유괴한 것이고 쇼타 또한 비슷한 상황으로 데려온 것으로 추측되며 엄밀히 말해 ‘직접 낳은 핏줄’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족이란 언제나 핏줄이 일 순위가 된다. 이는 핏줄을 통하지 않는 관계는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고선)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과도 같다. 하지만 유리를 학대하고 쇼타를 방치한 것은 핏줄로 이어진 친부모였다.


혈육만을 가족의 범위로 포함해 인정하는 사회는 소위 ‘정상성’이란 틀을 만들어 두고 그에 해당하지 않는 이들을 공동체의 울타리 밖으로 내쫓는다. ‘정상성’ 바깥 존재들의 이름은 그렇게 지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어져 있다’고 말하는 오사무의 대사가 더욱 무겁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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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족>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어른들은 더욱 상황이 나빠지거나 그대로 멈춰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더 나은 사람(혹은 상황)이 되고자 하는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가족이 해체되고 난 후, 오사무와 노부요는 과거를 끌어안은 채 그 삶에서 빠져나오고자 하는 노력보단 잠식된 삶을 택한 듯 보인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선택을 한 유리와 마트에서 물건을 훔친 후 일부러 매장 직원들에게 잡혔다고 고백하는 쇼타는 다르다. 아이들은 정상성을 벗어난 이 가족을 통해 사랑은 배웠지만 대물림되는 빈곤과 그에 따를 많은 것들을 이미 느꼈거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너무나도 차가운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와 쇼타가 내디딘 첫발은 희망이자 용기와도 같다.


그러므로 유리가 처음 등장한 신과 마지막 신은 대구(對句)한다. 영화 초반부, 유리는 복도에 앉아 복도 너머의 좁은 틈을 통해서만 밖을 보지만 마지막 씬에서 유리는 직접 까치발을 들고 복도 너머를 응시한다는 점에서 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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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영화를 보며 느꼈던 감동 뒤의 씁쓸한 감정은 따뜻하지 못한 세상에 따뜻한 마음을 품고 살아갈 아이들이 받을 상처가 미리 보이는 것만 같은 심정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따뜻함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모순된 세상 앞에서 관객인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한한 응원만 보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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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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