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나온 자리에는 항상 서로가 있었음을 - 룩 백 [영화]

글 입력 2024.09.17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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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디의 유명한 곡 중 하나인 “촛불 하나”는 삶에 대한 비관으로 가사의 말문을 연다. ‘왜 이렇게 삶이 힘들기만 한지/누가 인생이 아름답다고 말한 건지/삶이 내게 준 건 끝없이 이겨내야 했던 고난들뿐인걸.’


하지만 이렇게 힘든 인생 속에서 그들은 ‘힘내, 넌 할 수 있어’라는 격려를 건네지 않는다. 대신 지치고 힘들 땐 내게 기대라고 말하며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라는 굳건한 믿음을 심어준다. 절망적인 순간에 사람 한 명이 내 옆에 있을 뿐인데 어쩐지 격려의 말보다 기댈 곳을 내어주는 말이 더 힘이 되는 건, 삶의 가장 큰 위안이 함께하는 사람들일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준다.


영화 <룩 백>은 이처럼 서로에게 기댈 곳을 마련해주는 두 소녀의 삶과 추억을 담은 내용이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영화지만, 한 사람의 성장과 그로 인해 받는 위로와 공감을 모두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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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향해 함께 그림을 그린다는 것


 

영화의 주인공인 초등학생 ‘후지노’는 학보에 매주 자신의 만화가 실릴 만큼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갖추고 있다. 학급 친구들 모두가 인정하는 실력이지만 어느 날 함께 실린 ‘쿄모토’의 만화를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한 그동안의 나날이 무색해질 만큼 훨씬 더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갖춘 쿄모토의 만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는 쿄모토를 은근히 무시해왔던 후지노였기에 그 충격은 상당했다.


열등감을 느낀 후지노는 그때부터 피나는 연습을 하며 그림 실력을 갈고닦는다. 하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쿄모토의 실력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한다. 그 후 시간은 흘러 졸업이 다가오고 담임 선생님의 부탁으로 쿄모토의 졸업장을 전해주러 온 후지노는 쿄모토와 대면하게 된다.


쿄모토의 방문 앞에서 충동적으로 그린 네 컷 만화가 문틈 사이로 들어갔고, 그것을 본 쿄모토가 다급하게 후지노를 불러 세운 것이었다. 쿄모토는 오랜 시간 동안 후지노가 그린 그림의 팬이었다며 사인을 부탁하고 후지노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등 뒤에 사인을 해준다.


자신의 그림을 동경해왔다는 쿄모토의 상기된 목소리에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던 후지노는 그와 헤어진 후 묘한 희열을 느낀다. 그림을 포기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당사자가 자신의 오랜 팬이었다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쿄모토를 향한 열등감을 키워왔던 마음이 깨끗하게 희석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날 후지노는 비 오는 거리를 경쾌하게 뛰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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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일을 계기로 가까워진 두 소녀는 함께 만화를 그린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출판사에 작품을 제출할 기회도 얻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한 도움이 되며 함께 얻어낸 성과로 다양한 추억을 쌓아간다.


사람이 무서워 학교에도 나가지 못하고 방 안에서 만화만 그렸던 쿄모토는 후지노를 통해 세상을 경험하고 즐거움을 쌓는다. 맛있는 것을 먹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양한 장소를 체험하는 두 소녀의 모습은 같은 꿈을 향해 나아가는 찬란한 청춘의 시절을 연상케 한다. 아무한테도 말 못 했던 속사정을 고백하는 쿄모토와 그 사정을 이해해주는 후지노의 우정 사이에는 무엇하나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다.

 

 


서로에게 등을 보인다는 것


 

그러나 그렇게 지속될 것만 같았던 행복은 두 사람의 상충된 의견으로 서서히 분열되기 시작한다.


영화의 제목인 “룩 백(Look Back)”과 같이 작품에서는 뒷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그림 연습을 하는 후지노가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은 앞모습이 아닌 등을 보인 뒷모습이다. 후지노와 쿄모토가 함께 그림을 그릴 때도, 거리를 구경할 때도 두 사람의 뒷모습이 주를 이룬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 등이라는 신체 일부는 중요한 소재로 작용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함께 만화를 연재하고 싶은 후지노와 대학에 가서 순수미술을 배우며 후지노가 없는 세상에서 혼자 힘으로 살아보고 싶은 쿄모토. 후지노는 자신의 등 뒤에 있어야 더 잘 될 것이라며 그를 설득하지만, 쿄모토는 뜻을 굽히지 않는다. 결국 후지노는 대체자가 많을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차갑게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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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만화를 그리던 후지노는 뉴스로 한 소식을 접한다. 쿄모토가 재학 중인 학교에 괴한이 침입해 상당수의 학생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곧이어 후지노는 쿄모토가 사망자 중 한 명이라는 소식 또한 접하게 된다.


그를 추모하고자 쿄모토의 방에 들어선 후지노는 자신이 연재하는 만화의 단행본과 독자 설문 엽서, 처음 만난 날 쿄모토에게 해 준 사인을 발견한다. 다른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쿄모토에 대한 서운함에 등을 보이며 가차 없이 돌아섰으나, 그렇게 돌아선 후지노의 등을 묵묵히 밀어주고 있었던 쿄모토의 흔적은, 직접 건네는 백 마디의 말보다 더 든든하고 따스했음을 후지노는 그제야 깨닫는다.

 

 

 

사실 난 만화 그리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이 영화가 더욱 마음 깊이 와닿는 이유는 일본의 여러 사건과도 그 의미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래 <룩 백>은 만화를 원작으로 하여 만들어진 영화이며 만화 작가는 집필 동기를 ‘동일본 대지진’과 연결 짓는다. 실제로 작가는 미대생이었으며, 대지진이 발생한 직후 피해 복구를 위해 자원봉사를 가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단한 무언가가 없다는 것에 무력감을 느낀다.


그런데 작가가 이 감정을 극복한 방법은 만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현실과 동떨어져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었으나, 신기하게도 만화를 그리며 그런 감정의 발산과 함께 지난날의 추억까지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룩 백>에 나오는 쿄모토 사망 사건도 실제 일본의 ‘교토 애니메이션 제1 스튜디오 방화 사건’을 배경으로 삼은 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만화를 그리며 무력과 슬픔을 극복하고 즐거움과 추억으로 채워나가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의 후지노도 만화 그리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그 과정은 마냥 즐겁지도 않기에. 그럼 왜 그림을 그리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영화는 쿄모토와의 추억을 나열하는 장면으로 대신한다.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늘 자신의 작품의 열렬한 독자였던 쿄모토.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함께 웃고, 경험하고, 고민했던 순간들은 후지노가 계속 연필을 잡게 만드는 이유였음을 깨달으며, 중요한 건 그 만화를 함께 나누는 사람이었음을 인식한다. 그 후 후지노는 그 소중한 존재를 잃었음을 자각하고 목놓아 울어버린다. 영화의 후반부부터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그림만 그렸던 후지노가 쏟은 눈물은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얻지 못했을 과거의 흔적을 연상시키며 그 허전함을 관객에게 오롯이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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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노는 자신의 네 컷 만화가 아니었다면 쿄모토가 방 안에서 나올 일도 없었을 거라며 스스로를 자책하지만, 이후 펼쳐지는 영화 속 또 다른 세계관은 두 사람의 필연성을 굳건히 나타낸다.


다른 선택을 해 후지노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 시기만 늦춰졌을 뿐, 여전히 쿄모토는 후지노의 팬이었으며 그와 같이 그림을 그릴 것이라는 상황의 불가피성은 그들이 함께 나아갈 꿈의 가치를 증명해준다. 결국, 쿄모토는 후지노와 함께 한 시간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마저 안겨주며 후지노의 괴로움에 위로를 건넨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 후지노가 계속해서 만화를 연재하는 뒷모습을 보여주며 마무리되는 것은 그 등 뒤를 받쳐주는 쿄모토와 같은 이들은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의 희망을 발아한다. 그리는 행위를 지속하며 상기시키는 과거의 흔적과 또 다른 새로움은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나아갈 길을 만들어줄 것이다. 다시 웃게 될 그를 기대하며, 함께 그림을 그렸던 후지노와 쿄모토의 등을 넘어선 표정이 유난히 궁금해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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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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