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 화가가 사랑한 밤

글 입력 2024.09.17 12:5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나는 밤을 정말 좋아한다. 밤에 읽는 책이 더 잘 읽히고, 밤에 하는 산책이 더 평화로우며, 밤에 나누는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깊은 밤이다. (덧붙이자면, 밤에 쓰는 글이 더 감성 넘친다) ‘올빼미’, ‘야행성 인간’, ‘밤에 잠 좀 자라’ 등의 다양한 말을 듣는 나에게 밤은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다.

 

 

화가가 사랑한 밤 평면 표지.jpg

 

 

<화가가 사랑한 밤>, 제목에 ‘’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밤과 관련된 작품이 나오는 걸까? 아니면 밤에 영감을 얻었던 화가들의 이야기를 다룬 걸까? 궁금해하며 책을 펼치려니 안에 무언가 끼워져 있는 게 느껴졌고, 그것은 엽서였다. 한 장 한 장 살펴보니 밤이 표현된 명화들이었다. 밤이라는 시간이 이렇게나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었다니, 더 많은 밤을 만나보기 위해 책을 펼쳤다.



 

고독과 상처를 치유하는 밤, 에드바르 뭉크


 

누군가에게는 포근할 밤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고독한 밤이 될 수 있다. 뭉크에게 밤은 그런 시간이었다. 어린 나이에 결핵으로 어머니와 누나를 잃은 뭉크 곁에는 엄격한 아버지만이 남아 있었고, 뭉크는 아버지로부터의 도피처로 파리를 선택했다. 그러나 파리에 있는 기간 동안 뭉크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생 클루의 밤>이다.

 


[크기변환]생클루의 밤.jpg

에드바르 뭉크, <생 클루의 밤> (1890)

 

 

책의 초반 내내 따스한 밤을 그려낸 작품들이 많이 나와 의외라고 생각하던 참에 만나게 된 <생 클루의 밤>은 확실히 앞서 본 작품들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어렴풋이 비치는 창밖의 빛이 방바닥에 그림자를 드리울 만큼 방 안은 캄캄하고, 그림 속 남자는 사람인지 아닌지 분간조차 어려울 정도로 어둠과 하나 되어 있었다. 이 남자는 뭉크 자신이다. (찾아보니 뭉크의 아버지로 보는 소견도 있다) 이제 곁에 남은 가족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뭉크는 얼마나 고독했을까?


그러나 뭉크는 밤을 고독의 시간으로만 그리지 않았다. 빈센트 반 고흐를 존경했던 뭉크는 점점 고흐의 색채가 짙은 작품을 그리게 되었고,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작품을 무려 여섯 편이나 그리게 된다.

 


[크기변환]별이 빛나는 밤.jpg

에드바르 뭉크, <별이 빛나는 밤> (1922)

 

 

그 중 책에 삽입되어 있는 작품은 1893년, 1922년의 <별이 빛나는 밤>이다. 1922년의 <별이 빛나는 밤>은 <생 클루의 밤>과 동일한 화가가 그렸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밝고 아름답다. 고독과 쓸쓸함이 묻어나던 뭉크의 밤은 시간이 지나 회복과 치유의 밤으로 바뀌었다. <절규>를 그리던 화가가 밝은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혼란한 도시와 평온한 시골의 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크기변환]포츠담 광장.jpg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포츠담 광장> (1914)

 

 

위 그림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사실 어디서 봤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그림 속 파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다. 왜곡된 신체 비율과 그저 검게만 표현된 눈은 알 수 없는 기이함을 자아낸다. <포츠담 광장>이라는 이름의 이 작품은 키르히너가 베를린에서 가장 번화한 교차로를 그린 것이다.


첫눈에 이 그림이 낮을 그린 건지 밤을 그린 건지 파악하긴 쉽지 않다. 녹색 바닥과 사람, 건물로 가득 차 있는 이 그림 속에서 하늘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림의 최상단, 그러니까 건물 위쪽(하늘로 추정되는 곳)이 어두운 걸 보니 밤인 것 같긴 하다.


키르히너가 그린 밤은 어둠이 짙게 깔린 평범한 밤이 아니다. 화려한 차림새의 ‘신사숙녀’들이 가득한 요란스러운 밤이다. 1914년에 탄생한 이 작품은 그 해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을 받았다. 내가 이 그림에서 묘한 기이함을 느낀 것은 당시의 불안함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깃들었기 때문이다. 5년 뒤에 키르히너가 낸 작품 <달빛 속 겨울 풍경>은 <포츠담 광장>과는 상당히 대비된다.

 


[크기변환]달빛 속 겨울 풍경.jpg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달빛 속 겨울 풍경> (1919)

 

 

산과 나무로 가득한 이 그림에서 긴장, 불안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인지 왜곡된 형태도 없다. 고요한 자연의 소리만이 들릴 것 같은 이 풍경은 키르히너가 요양 차 스위스로 이주했을 때 그린 풍경이다. 거칠고 역동적인 형태로 드러나던 도시의 밤과 다르게 안정적이고 평온했던 자연의 밤은 키르히너에게 치유의 시간이 되었다.

 

물론 회복 이후 도시로 돌아간 그의 삶은 나치 정권으로 인해 불행한 마무리를 짓게 되었으나, 자연의 밤을 통해 시대와 맞물린 혼란을 이겨내고자 했던 키르히너의 의지는 그의 작품 속에 살아있다.


이 글에서 이야기한 밤은 주로 회복, 치유와 관련되어 있었지만, 사랑과 자유, 기대 등을 담아낸 다양한 밤이 책에 많이 등장한다. 페이지를 가득 채운 밤의 모습들을 보다 보면 사람들이 각자 밤을 만끽하는 방식을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밤의 일대기를 살펴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림이 삽입된 페이지의 위아래 여백이 대부분 검은색으로 채워진 것은 그 몰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한 배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책 표지를 넘기면 저자인 정우철 도슨트가 남겨놓은 문장이 하나 있다.

 

"밝게 빛날 당신의 102번째 밤을 기다리며"

 

침대에 반쯤 누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훌훌 이 책을 넘기던 나의 어느 평화로운 밤이 이 책의 102번째 밤을 장식한 것만 같아 기분이 좋다.

 

 


김지현.jpg

 

 

[김지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9.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