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커튼 뒤 욕망과 무의식 - 서울세계무용축제

전복된 해부학적 풍경(SAL)의 [2122.21222]
글 입력 2024.09.17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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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성적(非性的) 관계를 순수로 포장하며 육체적 관계를 폄하하는 일은 자칫 자아와 신체 사이에 괴리감만 심을지 모른다.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느낀다면 ‘사랑’이 무엇인지 더 깊이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타액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과 결단의 행위다. 작품은 무의식의 신체가 보여주는 미묘한 찰나의 역동성을 탐구한다.

 

- 작품 설명

 


공연장의 스태프가 관객 입장을 안내하는 소리가 들리고, 관객석을 비추는 조명이 아직 환한 가운데, 무대의 한쪽에서 프리쇼가 진행되었다. 붉은 커튼 밖으로 한 명의 댄서가 하반신만으로 연기를 시작한 것이었다. 상반신은 아직 커튼 안쪽에 감춰진 채였다. 댄서는 발끝을 꿈틀거리듯 오므렸다가 펴고, 다리를 곧게 만들었다가 천천히 굽히는 등 섬세한 움직임을 펼쳤다. 이에 스피커를 통해 작게 들리는 사람의 숨소리와 입맞춤 소리가 더해지자, 왜인지 커튼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침 혹은 피’ 그리고 ‘체액’


 

제27회 서울세계무용축제의 국내초청 프로그램, ‘전복된 해부학적 풍경(SAL)’의 [2122.21222]는 15세 이상 관람 등급의 공연이었다. 입장 전 공연장 앞에 놓인 팻말을 통해 ‘성적인 장면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는 안내말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아트디렉터 배진호가 이끄는 ‘전복된 해부학적 풍경(SAL)’은 무용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예술 분야와 협업해 동시대적 과제를 탐구하며 이를 공간예술로 풀어내는 복합예술 단체다. 단체명 ‘SAL’은 살갗을 의미하는 ‘살’이자 ‘Subverted Anatomical Landscape(전복된 해부학적 풍경)’의 약자로, 살이라는 껍질 속에 비가시화된 개인의 사고체계와 육체적 특성을 전위적인 움직임으로 무대에 표현하고자 하는 목표를 담았다.

 

SAL이 이번 [2122.21222]에 담은 주제는 육체적 관계와 사랑이었다. 우선 숫자로만 표기된 암호 같은 제목을 풀어봐야만 할 것 같다. 제목의 숫자는 ‘체액’이라는 의미의 ‘Body Fluid’ 각 영문자의 획수를 숫자로 표기한 것이다. 또한 ‘2’라는 숫자가 사람의 움직임의 형태와도 닮아있다는 점에서 이 제목이 몸의 언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도 적합했다고 배진호 아트 디렉터는 설명했다.

 

이번 작품은 2021년 초연 이후 3년 만의 재연으로, 초연 당시 제목은 [침 혹은 피]였다. 단발성의 체액침과 진한 맹세를 상징하는 체액인 피를 나열한 것이었던 제목은 이번 재연에서 ‘체액’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표현으로 리뉴얼되었다.

 

 

 

무의식 세계로의 전환


 

메인 photo by 윤보람.jpg

 

 

작품이 표현하는 대비 속에 고민할 만한 지점이 있었다. 육체적 관계는 통상 일시적인 쾌락으로, 반면 사랑은 영원하고 고귀한 것으로 구분되는데, 작품은 이러한 통념을 넘어서 심도 있는 고찰을 시도했다.

 

즉, 서두에서 묘사한 프리쇼는 단순히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인 연출이 아니었다. 특히 붉은 커튼은 관객을 본 공연으로 자연스럽게 이끄는 중요한 장치로 작용했다. 커튼은 시각과 청각 정보를 일부 제한하는 장막의 역할을 하며 관객이 커튼 속을 상상하게 만들었고, 이는 본 공연으로 이어지는 감각적인 연결고리가 되었다. 이로 인해 관객은 작품이 끌어들이고자 한 무의식의 세계로 전환할 준비를 하게 된 셈이다.

 

조명이 꺼지고 본 공연이 시작되자, 한 명의 댄서의 다리 사이로 다른 댄서들의 다리가 서서히 포개지며 등장했다. 여전히 커튼은 오르지 않은 상태였다. 음량은 커졌고, 뱀이 엉키는 광경을 보듯 숨 막히는 긴장감이 공연장을 채웠다. 이제 관객은 그간 모른 체 해오거나 또는 비가시화되어 온 욕망의 언어에 50분 간 몰입하게 될 것이었다.

 

이번 서울세계무용축제는 현대무용을 시민들이 더 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데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2122.21222]에서는 뚜렷한 서사와 캐릭터 성을 통해 관객들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

 

막이 오른 뒤의 배경은 무도회장. 무대 중앙에는 드레스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원형으로 둘러앉아 있었고, 그들은 상냥한 미소를 주고받으며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무대의 한편에서는 프리쇼를 펼친 댄서들이 그들의 내면에 숨겨진 욕망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시공간의 규칙을 따르지 않은 연출은 두 세계의 대비를 효과적으로 보여주었고, 겉치레 없이 욕망에 충실한 댄서들은 격정적이고 강렬한 움직임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예술가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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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서울세계무용축제에는 본 공연 외에도 관객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확장할 수 있는 부대행사들이 마련되었다. [2122.21222]에서는 공연 이후 약 30분간의 ‘예술가와의 대화’ 행사가 진행되었으며, 배진호 아트 디렉터, 최호정 댄서, 민경원 댄서가 참여해 관객들과 질의응답을 나누었다. 이를 통해 안무가와 댄서들이 작품에 담은 생각을 직접 들어볼 수 있었다.

 

특히 육체적 관계를 표현하는 안무에 대한 질문에서 댄서들이 보여준 프로페셔널한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는 본연의 자신을 지우고, 작품의 본질을 온전히 표현하는 데 몰두한다고 설명했다. 그중에서도 이번 작품은 ‘민낯’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했는데, 작품의 메시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어떻게 캐릭터로 표현할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고 말했다. 또 내면의 솔직한 모습과 인간성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날것의 장면들이 오히려 더 많은 예술적 욕구를 자극했다고도 덧붙였다.

 

배진호 아트 디렉터는 현대무용이 우리의 일상과 가까이 있음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는 이 공연을 관람할 때 그저 보고 느끼기를 바란다고 전하며, 그가 작품에 담은 주제 또한 매우 일상적인 영역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했다.

 

이번 서울세계무용축제는 많은 이들에게 현대무용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고, 이를 일상 속에서 더 가깝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중요한 장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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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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