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초기화하시겠습니까? – 연극 '시뮬라시옹'

글 입력 2024.09.1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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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시옹 : 모사된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고 실재가, 실재가 아닌 것으로 전환되는 과정


죽은 아내가 AI로 복원되고 점점 진짜처럼 업데이트가 되는데도, AI 아내의 현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선욱은 결국 시뮬라시옹을 초기화했다. 똑같은 레퍼토리에 싫증이 날 걸 알면서도. 선욱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AI 아내에게 복잡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연극 ‘시뮬라시옹’의 결말이다. 시뮬라시옹의 의미를 그대로 표현한 이야기로 AI를 대하는 인간의 심리를 세밀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이는 껍질일 뿐이었다. 껍질을 까보니 그 안에는 울림이 있는 메시지로 가득 차 있었다.


따라서 결말이 의미하는 바도 하나가 아니며, 선욱이 초기화한 건 AI 아내뿐만이 아니었다.



시뮬라시옹 포스터 최종.jpg

 

 

10년 넘게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 지역 상공을 비행하고 있던 비행기가 포격에 의해 추락했다. 그 비행기에 타고 있었던 선욱의 아내 상아는 세상을 떠났다. 2년 후, 선욱은 여전히 상아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상실의 아픔과 그리움에 겨우 살아내고 있던 선욱은 우연히 시뮬라시옹에 대해 알게 된다. 시뮬라시옹은 그리운 사람을 복원해서 안경만 끼면 렌즈를 통해 실재처럼 모사한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AI이다.


선욱은 상아와 관련된 데이터를 시뮬라시옹에 입력한다. 이윽고 시뮬라시옹은 ‘프로젝션이 완료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선욱은 기대 반, 의심 반으로 안경을 써본다. 거짓말처럼 등장한 아내 상아에게 선욱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선욱이 기억하던 밝고, 활기찬 상아의 모습에 그리움과 반가움이 섞인 울음을 터트렸다.


놀이공원 어트랙션 엔지니어인 선욱에게 상아는 지니랜드에 데려가달라고 하고 결국 그는 늦은 밤, 사람들 몰래 그녀를 데리고 간다. 아무도 없는 놀이공원에서 신이 난 상아는 여기저기를 뛰어다닌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며 따라다니는 선욱. 그의 얼굴에는 전 장면에서 볼 수 없었던 행복이 있었다.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던 선욱은 상아의 행동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싫증이 난다. 선욱은 상아가 생전에 썼던 일기장을 입력하고, 휴대폰을 연결하여 데이터를 추가한다. 데이터를 입력하던 중, 혼자 이탈리아 여행을 간 줄 알았던 그녀의 독사진에서 다른 남자가 비치는 걸 발견한다.


그 남자의 신상정보를 얻은 선욱은 동훈이 운영했던 화실에 찾아가고, 당시 승객 명단까지 확인하며 동훈이 상아와 아는 사이이며, 같은 비행기를 탔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한편, 추가로 입력된 데이터로 더욱 진짜 같아진 AI상아. 그리고 시뮬라시옹의 세계에 상아 뿐만 아니라 동훈까지 등장한다. 상아의 휴대폰 속 데이터를 입력하던 중 동훈이 비친 사진을 선욱이 확대하면서 오류가 생긴 것이다.


오류를 해결한 뒤 돌려받은 안경을 다시 써보지만, 우울하고 차가웠던 상아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상아의 일기장과 휴대폰의 데이터로 인해 모사가 아닌, 실재 같아진 대신 선욱이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어둡고 우울해했던 상아가 시뮬라시옹 세계에도 나오게 된 것이다.


선욱이 그토록 원하던 죽은 아내를 다시 만나고 더욱 진짜 같아진 상아로 업데이트됐지만, 선욱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문제를 회피하고, 갈등 앞에서 도망쳤다. 상아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았고, 자신의 기준에서 생각하여 상아를 행복하게 해줬다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상아가 불만을 토로하고, 서운함을 이야기해도 상아를 예민하고 우울한 사람으로만 치부하고 몰아갔다.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자신의 태도와 결점을 상아에게 뒤집어씌웠다. 눈을 보고 대화도 하지 않고, 무관심했다. 결국 상아가 살아있을 때처럼, 똑같이 상아의 마음을 닫게 했다.


극의 말미쯤에서 상아는 선욱에게 혼자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온다고 통보 아닌 통보를 한다. 매번 피하는 쪽은 선욱이었지만, 이번엔 상아가 피했다. 도망치다시피 떠나는 상아의 뒷모습은 매우 쓸쓸해 보였다. 이는 생전에 상아의 마지막 모습이었으리라고 짐작했다.


선욱은 현실에서처럼 시뮬라시옹의 세계에서도 상아를 떠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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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배경이 미래인 만큼 무대도 미래와 어울리게 꾸며져 있었다. 극장 안으로 들어갈 때 통로 천장과 바닥에 프로젝션할 때 나왔던 미디어가 나오고 있었다. 그 통로를 지나치면서 정말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간 느낌이 들었다.


무대연출도 인상 깊었다. 선욱이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장면에서 배우들이 우산을 쓰고 주인공 주변을 스쳐 지나갔다. 실재와 가상 세계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부분에서는 소품들을 위로 들어 올리는 퍼포먼스로 물건이 뒤집어지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제야 데칼코마니처럼 꾸며진 무대를 발견했다.


위치만 다를 뿐, 같은 모양의 조명이 위, 아래로 비치되어 있었다. 이는 시뮬라시옹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시각화해서 보여줬다고 생각하는데, 인상 깊은 연출이었다.


또 하나 기억나는 건, 커튼콜 할 때 배우들이 스크린을 향해 박수를 치던 모습이었다. 이 연극의 또 다른 주인공인 AI 시뮬라시옹에게 박수를 잊지 않았던 배우들과 제작진의 행동은 참 훈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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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사람과의 관계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해줬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고 따지는 선욱에게 상아가 그동안의 서운함과 상처를 쏟아냈다. 알고 보니 상아가 이것저것 배웠던 것도 외로움을 채우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선욱은 상아에게 무관심하니 아무리 하고 싶은 것을 해도, 외로움이 채워지지 않았고 결국 우울증까지 겪게 됐다.


백화점이라도 가면 지하 1층에 있겠다고 혼자 둘러보게 하면서 함께 있어 주고, 잘해줬다고 선욱 혼자 착각했다. 왜 우울한지, 힘든지, 표정은 왜 어두운지 물어보지 않았다. 상아가 그간의 서운함을 토로해도 경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아를 넌 예술가라 예민하니까 라는 식으로 단정 짓고, 무시했다.


뭐하냐고 묻는 선욱에게 상아는 ‘퇴근하고 오면 먼저 말 걸어준 적도 없더니’라는 말을 한다. 상아는 선욱에게 바랬던 건 딱 하나, 눈을 마주치며 대화하는 거였다.


그런 상아에게 선욱은 고작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며 화를 냈다. 선욱은 상아의 마음을 공감하려 하지 않았고, 수용하지 않았다. 상아가 갈등을 풀기 위해 대화하자고 하면, 선욱은 어떻게든 회피했다.


‘너랑 반대라서 좋았다며’라는 말만 반복할 뿐, 바뀌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상아가 변하기만을 바랐다.


생전에도, 시뮬라시옹을 통해 복원된 아내를 만났을 때도 여전히 선욱은 직면이 아닌, 회피를 선택했다.


그렇게 선욱은 자기 식대로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 위해 시뮬라시옹을 초기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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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내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찰지라도 눈을 보며 대화하지 않고 그 사람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많지 않다면, 그 사랑은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 오해만 생길 뿐이다.


사랑한다면서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소통이 단절되면 결국 그 관계는 끝이 난다. 늘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 귀히 여기지 않는 생각과 행동과 말은 흉기가 된다.


자신의 성격을 어필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내세워도 안 된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살아가려면 서로 맞춰나가야 한다. 선욱처럼 관계에 있어서는 내로남불의 인간이 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면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를 잘 이어 나갈 수 없다.


이 모든 걸, 세밀하면서도 잘 압축하여 담은 작품이었다. 바로 이것이 껍질 안에 있는 알맹이였다. ‘시뮬라시옹’은 연인, 부부, 부모와 자식이 함께 볼 가치 있는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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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의 관계


 

처음으로 시뮬라시옹을 통해 아내를 만났을 때, 선욱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해했다. 욕심이 생기고, 더 진짜 같은 아내를 원했다. AI일 뿐인 존재에게.


더 많은 데이터를 입력하고,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었지만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을 맞닥뜨리게 되자 처음에는 시스템을 탓했고, 마지막에는 아예 초기화를 해버린다. 그리고 AI에게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점점 현실감각을 잃어갔다. 결국 유가족이 사고 현장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음에도 그 기회를 차버렸다.


선욱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AI와 관련된 문제들이 떠올랐다.


선욱의 변화 과정은 우리와 AI의 관계와 닮아있었다.


동시에 시뮬라시옹의 도움으로 애도의 시간을 잘 버틴 후, 건강한 이별을 하는 정희를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AI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어가야 하는지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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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화는 모든 해답이 될 수 없다


 

AI를 포함하여 모든 스마트기기를 사용할 때, 고장이 나거나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초기화한다. 초기화하면 깔끔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그만큼 수고도 감수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부분을 인지하고 있기에 걸핏하면 초기화를 시키진 않는다. 먼저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한 다음, 버그를 해결하는 게 대부분이다. 초기화해도 버그를 해결한 다음에 한다.


이처럼 스마트기기도 초기화가 모든 오류를 해결해 줄 수 없듯이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없었던 일처럼 묻어버린 후 처음으로 돌아가는 건, 당시에는 해결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다. 시간이 흐른 후, 예기치 않은 순간에 초기화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리고 오류는 같은 모양으로든, 다른 모양으로든 반복된다.


따라서 결말에서 선욱이 초기화한 건, AI 상아뿐만 아니라 진짜 상아와 선욱의 관계도 있었다. 그 대가로 선욱은 시뮬라시옹의 세계에서만이라도 상아와의 갈등을 풀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다. 아마 선욱은 똑같은 레퍼토리로만 나오는 AI 상아만 만나거나 같은 상황에 마주하면서 또 초기화하며 반복할 것이다.


그렇게 상아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선욱에게 이해와 공감을 받지 못했다. 선욱은 상아를 영원히 외롭게 만들었다.


진정으로 가까워지고 싶거나 오래오래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사랑해야 한다. 초기화(회피)가 모든 해답이 될 순 없다.


이것이 ‘시뮬라시옹’의 결말이 의미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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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득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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