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상실에 대하여 - 시뮬라시옹 [공연]

글 입력 2024.09.18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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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보드리야르는 1981년 ‘시뮬라시옹’ 이론을 발표하였다. 시뮬라시옹은 ‘모사된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고, 실재가 실재가 아닌 것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말한다. 연극 <시뮬라시옹>은 이러한 시뮬라시옹 이론을 바탕으로 사랑과 감정, 관계에 더욱 집중한다.

 

 

시뮬라시옹 포스터 최종.jpg

 

 

연극 ‘시뮬라시옹’의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다.

 

"2034년, 10년 넘게 지속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 속에서 주인공 선욱은 2년 전 자율주행 비행기 사고로 아내 상아와 사별했다. 테마파크의 어트랙션 엔지니어인 선욱은 한 벤처 기업이 개발한 가상현실 재현 프로그램 ‘시뮬라시옹’을 통해 AI 상아를 만나게 된다. 부재했던 그녀의 존재를 경험하며 시뮬라시옹은 그의 일상에 깊게 스며든다. 그러나 데이터러닝으로 점점 더 실제화되는 AI 상아를 통해 선욱은 복원하려 하지 않았던 실제와 마주하게 되는데..."


제목을 보고 과학적 이론과 이해불가한 세계관이 펼쳐질 수도 있겠단 두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연극은 가까운 미래인 10년 후를 배경으로 하며 누구나 겪는, 그리고 겪을 세밀한 감정과 인간관계에 집중했다. 그래서인지 러닝타임 내내 몰입이 굉장했는데, 복원된 상아가 무대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왠지 모를 슬픔에 사로잡혀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연극을 보며 나는 크게 ‘복원’과 ‘초기화’라는 키워드에 사로잡혔다. 그리운 존재를 데이터로 복원하고, 또 그 복원한 대상이 생각과는 달라 초기화한다는 스토리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두 가지 키워드를 통해 작품을 보고 느꼈던 점을 말해볼까 한다.




복원하시겠습니까?


 

선욱은 소파에 앉아 독백으로 상아와의 기억을 들려준다. 상아의 직업, 평소 상아가 좋아한 것, 그리고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 이유까지. 서로 달라서 사랑하게 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시뮬라시옹 시스템은 듣고 정보를 입력한다. 이후 부족한 상아의 정보는 사진과 다이어리 등의 자료를 스캐너에 넣어 추가한다. 그럼 선욱은 특수 안경을 착용했을 때 구현된 AI 상아를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루하루 이전과 다를 바 없던 일상을 AI 상아와 지내게 된 선욱. 만족도를 물어보는 시뮬라시옹 프로그램에 선욱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한다며 더 이상 물어볼 필요도 없다고 한다.


만족스럽기만 할 줄 알았던 상아와의 일상. 상아와의 하루는 마카롱을 굽고 피아노를 치고 밤에 선욱이 일하는 테마파크로 향해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니는 것.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줄 알았던 상아와의 일상을 누리던 선욱은 어느 날 상아의 행동 패턴이 반복됨을 깨닫는다. AI로 데이터화한 상아는 선욱과 새로운 추억을 쌓고 나아갈 수 없는 존재인 거다.

 

시스템은 상아의 새로운 데이터를 스캔해 딥러닝을 할 수 있다 한다. 그에 선욱은 집안에 존재하는 모든 상아의 다이어리, 휴대폰 등을 끌어모아 새로운 데이터를 스캔한다. 그 과정에서 선욱은 상아가 비행기 탑승 전 찍은 사진에서 이상함을 발견한다. 사진 속 유리를 확대한 선욱. 그곳에는 미상의 남자가 비쳐있었다.


기억은 주관적이고 가변적이다. 우리의 기억은 기억의 주체가 느끼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선욱은 실제 상아가 느끼고 생각한 상태를 알지 못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하고 또 시간에 따라 변화하기에 오인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마치 선욱이 상아와의 관계를 ‘서로 달랐지만 그래서 사랑했고 매일 행복했던 관계’라고 기억하듯 말이다.

 

 

시뮬라시옹_1.jpg

 

 

상아는 감성적이고 갈등이 있으면 즉각적으로 풀길 바랐지만, 선욱은 이성적이라 갈등도 뒤로 밀어두곤 했다. 서로 다른 점에 이끌려 사랑을 시작했지만, 그 끝은 서로 달라 아프기만 한 시간이었다. 상아는 시간이 갈수록 외로움을 느꼈다. 선욱이 잠시라도 자신을 돌아봐 주길 바랐다. 자신을 알아봐 주고 또 관심 가져주길 바랐다. 결국 그림을 통해 자신을 알아봐 주고 이야기를 묵묵히 경청해 준 건 선욱이 아닌, 동훈(상아가 다니던 화실의 주인이자 화가)이었다.


선욱의 특수 안경에 이상이 생긴다. 선욱이 상아의 데이터를 새로 입력할 때 동훈의 얼굴을 확대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동훈의 아내 또한 시뮬라시옹으로 동훈의 데이터를 학습시켜 AI를 만들었고, 그러한 동훈의 데이터가 선욱의 시뮬라시옹을 통해 흘러들어오게 된다. 인간의 관계는 깊게 들여다보면 1:1이 아닌, 그보다 복잡하고 얽힌 무엇임을 알 수 있다. 마치 얽혀버린 선욱의 시뮬라시옹처럼 말이다.


 


초기화하시겠습니까?


 

자신이 몰랐던 상아의 일면을 알게 된 선욱. 비교적 최근까지의 데이터로 복원한 AI 상아를 통해 선욱은 상아의 내밀한 속사정을 듣게 된다. 상아와 선욱은 다툼을 겪고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복원된 상아는 밝던 처음과 달리 우울하고 말도 없으며 동훈과 감정을 나눈 상태에 놓여있다.


그에 시스템은 ‘초기화’란 선택지를 제공한다.


선욱은 데이터 초기화, 현 상태 유지, 시뮬라시옹 프로그램 구독 종료 이 세 가지 선택의 길에 놓인다. 나는 선욱이 시뮬라시옹 프로그램 구독을 종료하고 진짜 상아와 마주하며 상아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선욱은 데이터를 초기화하고 맨 처음 맑은 얼굴로 자신을 향해 환한 인사를 건네주던 시뮬라시옹 상아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길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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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상아의 데이터를 초기화하고 마는 선욱의 마지막 결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해맑은 상아의 얼굴을 향해 인사하는 선욱은 벅차오르던 처음과 달리 상실의 눈을 한다. 선욱은 이 기억에서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더 나아가면 다시 다툼이 반복되고 보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봐야 하므로. 그럼에도 선욱은 이 순간에 고여있는 것을 선택한다.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선욱은 여전히 상실한 (상아의 죽음과 더불어 자신이 알던, 그리고 행복인 줄만 알았던 두 사람의 관계 또한 상실한) 상태로 있을 것이다.


‘시뮬라시옹’으로 복원되는 AI는 반복되는 영상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구현하는 하루하루가 미세하게 다를지언정 큰 틀은 상아가 남겨둔 데이터에 의존하고 있다. 모사된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고 실재가 더는 실재가 아니게 된다지만, 이 연극은 오히려 실재보다 더 나은 대체는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니 현실에 충실하길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아내는 것만 같다.


*


나는 선욱을 통해 인간의 이기심을 들여다보았다. 상아는 특수 안경 안에서만 살아있다. 그렇기에 선욱은 상아와 갈등을 겪다가 안경을 벗어 상아를 없앨 수 있다. 현실과 달리 언제든지 갈등의 회피가 가능하고 행복한 시절에 계속 머무를 수 있다. 결국 선욱은 자신을 봐달라던 상아를 또 한 번 더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작품을 보고 나니 이 글을 읽을 모든 이에게 묻고 싶어 진다. 만일 선욱과 동일한 상황에 놓인다면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지 말이다. 데이터를 복원할 것인가? 그리고 그 데이터를 초기화할 것인가? 어떠한 선택에도 답은 없지만, 나는 내가 기억하는 그 존재와의 기억을 기록하길 노력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더 이상 변하지 않고, 또 우리를 잃어버리지 않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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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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