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전을 통해 장애인권의 현주소를 묻다 [도서/문학]

[심청전]을 통해 엿보는 전근대의 장애인권과 함의된 가치를 알아보는 글
글 입력 2024.09.18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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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현대의 사회문제, 고전에서 원인을 찾다




“하여튼 날 때부터 장님은 아니었다. 그 말씀이지요?”

“그렇다니까.”

 

- 화주승과 심학규의 대화 中

 

 

[심청전]은 현대의 관점에서 봤을 때 분명한 장애혐오 텍스트이다. 왕비가 된 심청이와 재회한 심학규가 눈을 뜨며 결말을 맺는데, 이는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채워 넣어야 할 결핍 요소로 본 것이다. 물론 이 당시 쓰인 문헌 중,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소재가 있다면 오히려 특이한 정서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 정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청전]을 교과서에서 제외하는 것이 답이 될까?. 교과서에서 제외한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미 작품을 접한 사람의 기억을 지울 수도 없는 노릇. 문제는 더욱 미궁으로 빠지게 된다. 이미 세상은 이러한 질문에 수 없이 부딪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 ‘재구성’이다. 서양 고전 명작에 다양한 인종을 추가한다던지, 차별 여지가 있는 설정을 바꾼다던지 등. 다양한 시도가 점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시대차이가 명확하니 시대착오적인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텍스트를 바라보는 현대의 관점대로 해석하여 재구성을 하면 된다. 그 필요성을 주창하기 위해 이번 오피니언을 구성해 보았다.

 

심학규는 후천적 시각장애인이자, 빛도 감지할 수 없는 전맹으로 묘사된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따지면 6급(나쁜 눈의 시력이 0.02이하인 사람)에 해당되는데 이는 전체 시각장애인 중 12.5%에 불과하다. 현대의 기준에서는 저시력자와 전맹을 모두 통틀어 시각장애인의 범주로 묶지만 전근대는 전맹 시각장애인만을 ‘봉사’, ‘소경’ 등 장애차별 단어로 칭하며 멸시했다는 점을 먼저 짚고 넘어간다. [심청전]은 효를 중시한 조선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문학 사료이지만 동시에 조선시대의 장애인권을 엿볼 수 있는 창구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심청전]에서 묘사되는 시각장애인, 심학규의 행동과 말. 그리고 그를 표현하는 묘사를 통해 조선의 장애인권을 현대인의 시선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눈을 뜨기 위한 욕구? 본질은 자립이다


 

작중에서, 심학규는 비장애인으로의 회귀, 즉 눈을 뜨기 위해 화주승에게 공양미 삼백 석의 시주를 덜컥 약속하여 소중한 딸을 위기에 빠뜨린다. 이 욕망을 해체하여 본질을 들여다보도록 하자. 전근대사회는 오늘날과 달리 가족을 단위로 살아가는 가족중심 사회였다. 장애인 복지정책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족 부양을 원칙으로 삼아 장애인으로 하여금 가족과 더불어 살도록 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친척, 이웃 등 마을 공동체가 지원해주도록 하였다. [심청전]에서도 이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보호자인 곽씨 부인이 세상을 떠나는 문제가 발생했음에도 마을 공동체의 도움으로 생활을 이어올 수 있었다. 심청이가 심학규를 보호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부양의 책임은 마을 공동체에서 가족인 심청이가 건네받게 되었다.

 

 

청이는 내일부터는 어떻게든지 아버지를 집에 앉혀둬야만 하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도사렸다.

 

- 심청이의 속마음을 묘사하는 구절

 

 

효심 깊은 심청이는 심학규를 집에 앉혀두기만 하겠다고 다짐하고 이를 실천한다. 심학규는 이 날부터 어린 딸이 자신을 부양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극진한 효의 실천으로 읽힐 수 있겠지만 이 장면부터 심학규의 자립생활은 종결된다. 심학규는 집에 가만히 앉아 심청이가 동냥해오는 밥을 먹으며 지낸다. 그가 밖으로 나서려 할 때면 심청이는 만류하며 누워있으라고 청하기도 한다. 효의 실천이 아닌, 섬뜩하게도 약자에 대한 구속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심학규의 시각장애가 자립을 영위하지 못할 정도의 장벽인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곽씨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홀몸이 된 심학규는 심청이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도움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집을 나서 행동했다.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것과 원하는 도움을 능동적으로 청하는 것은 분명 다르고, 이는 장애인의 심리 안정의 면에서 큰 차이로 작용한다. 오늘 날 자립생활을 하고 있는, 시각장애인들은 시각장애로 인하여 다양한 문제 상황에 놓이게 되지만 주눅 들지 않고 적극적으로 상황을 해결해 나간다.

 

이는 자립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은 자신의 고유한 권한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청이의 지나친 보호로 인해 심학규는 집 안에 구속된다. 삶의 결정권을 심청이에게 헌납한 심학규가 항상 다니던 길에서 우물에 빠지게 된 것도 무료한 일상에 지쳐 길을 서성이던 중에 발생한 사고다. 이 사고는 죽음의 위기와 연결된다. 다른 문학이나 선전 문구에서도 자유와 죽음을 대조하는 형식이 빈번한데 <심청전>에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정리하면, 심학규의 욕망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죄책감과 자립이다.


 

‘내가 눈을 뜬단 말이야. 우리 청이 얼굴도 내 눈으로 볼 수 있단 말이지?

(…중략)

다시 글을 읽어 과거에 장원 급제를 하여 금의환향 돌아온단 말이지. 그러면 마을 분들, 내가 그동안 신세진 분들의 은혜도 갚을 수 있게 된다. 우리 청이도 이제 고생 안 시키고….‘

 

- 심학규의 속마음을 묘사하는 구절

 

 

초반부에 묘사된 심학규의 비범한 성품을 고려했을 때, 심학규가 장원 급제를 원하는 것은 개인의 출세욕이 아닐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장원 급제는 수단일 뿐이다. 마을 분들에게 은혜를 갚는 것과 아내 무덤에 비석을 세워주는 등 죄책감을 해결하는 것과 심청이의 부양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이 목적이다. 이 욕망이 발현되는 순간도 흥미롭다. 

 

심학규의 욕망은 거칠고 급진적이다. 그렇기에 공양미 삼백석이라는 거액의 재산을 고심 없이 시주하기로 약속하게 된다. 만약 심학규가 홀몸으로 젖동냥을 하며 아기 심청이를 키울 때, 화주승이 접근하여 눈을 뜨는 대가로 공양미 삼 백석을 요구했다면 심학규는 제안에 응했을까? 이 가정된 상황에서 아내의 비석을 세우고 동네 사람에게 신세지고 싶지 않다는, 죄책감 해소의 욕망은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심학규에게 자립의 욕망은 비교적 희미했을 것이다. 자립적으로 심청이를 키우고 싶을 수 있지 않나? 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대가가 공양미 삼 백석임을 감안해야한다. 극중에서 공양미 삼 백석은 심청이의 목숨으로 치환될 정도로 큰 댓가이다. 공양미 삼백 석을 저당 잡히는 건 자립의 상태가 아닌 족쇄의 체결이 될 것이다. 게다가 홀몸으로 심청이를 키우던 심학규에겐 지켜야할 생명이 존재하기에, 이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이미 충분하게 자립 욕망이 채워지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 됨’은 자녀에 대한 양육전략 수립 및 수정의 과정이자 양육에서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극복하는 과정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아버지들은 아버지로서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자신이 속한 맥락 속에 적응하며, 부모로서 자기 역할과 자아 정체감을 형성해 가기 때문이다. 

 

즉, 심학규는 심청이의 효심으로 보이는 구속으로 인해 자립을 잃어버렸기에 비장애인으로의 회귀로써 이를 회수하고자 했다. 이러한 욕망이 강하게 피어오른 심학규는 화주승의 제안에 응하게 되었고 이 결심이 지금까지도 효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심청이 인당수 다이빙’ 사건의 발단이 되어 지금까지 회자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심청전>의 등장인물들이 필자가 주장한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청이는 전근대 제일의 가치로 여겨지는 ‘효’의 실천을 위해 행동했고, 심학규는 심청이의 걸림돌이 되며 독자들에게 ‘효’를 극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기능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게다가 장애인에 대한 멸시가 당연시 여겨지던 시절에 등장한 장애인 캐릭터이기에 장애에서 파생될 것으로 여겨진 고난을 다양하게 겪는다. 작자 미상이고 구전된 설화이기에 시대상을 반영하여 현대인의 시각에서 이해할 수 없는, 등장인물들을 두둔할 수는 있을 것이고 실제로 그래왔다. 

 

그러나 이렇게 축적되어 파생된 가치관은 현대의 관점과 맹렬히 부딪힌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권력-지식 이론을 통해 오랜 기간 축적된 권력이 얼마나 위험한 지 경고한다. 예를 들어 동성애를 처벌하지 않는 사회이지만 은근히 그들을 소외하는 담론을 형성하여 혐오의 정당화가 규범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심청전>을 재해석 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 즉, 시대상이라는 전근대의 관점을 두둔하며 현대의 관점을 무시한다면 혐오와 차별을 재생산하며 축적된 권력에 잡아먹히게 될 것이다.

 

 

 

고전의 가치는 현대에도 유효한가


 

심학규는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진 후에 눈물과 한숨을 지으며 세월을 보낸다. 충격적인 과거를 계속해서 떠올리는 것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과 엇비슷해 보이지만, 잊고 싶은 과거를 의지와 무관하게 떠올리게 되는 것과 달리 심학규는 막심한 죄책감으로 인해 의도적으로 심청이를 붙잡아 두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후 심학규는 뺑덕어멈을 만나 시달리다가 가진 것을 모두 잃게 된다. 뺑덕어멈도 심청이와 같은, 보호자로 기능하지만 욕망에서 비롯된 목적이 상이하다. 심청이는 ‘효’라는 당대에 제일로 추구되는 가치를 위해, 뺑덕어멈은 심학규의 재물을 착취하기 위해 행동한다. 심청이나 뺑덕어멈이나 둘의 휘하에 놓여 있을 때, 어떤 경우에서라도 심학규의 자립은 요원하다. 그러나 뺑덕어멈이 자본을 대가로 보호를 제공하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요소이다.

 

심학규의 입장에서 뺑덕어멈에게 보호를 받을 때, 딸에게 신세를 지는 것 보다 긍정적으로 여길 요소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는 죄책감의 여부이다. 이 사실은 멀리서 찾을 이유가 없다. 현대 사회에서 부모가 간병이 필요할 때, 자식에게 부담이 될까 염려스럽기에 전문 간병인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은 경우를 예시로 들 수 있다. 전문 간병인은 가족이 아닌데다, 보호와 금전을 맞바꾸는 계약이기에 뺑덕어멈의 보호는 현대의 간병문화와 빗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하다. 분명 뺑덕어멈과 심학규는 혼인한 사이로 묘사되고 두 사람간의 관계는 정당한 계약 관계가 아닌, 착취의 관계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청이를 떠나보내고 뺑덕어멈에게 시달리며 눈물로 세월로 보내는 심학규에게 오로지 고통만이 존재했던 건 아니라는, <심청전>의 숨겨진 사실을 조망하고 싶다. 심청이를 사지로 내몰았다는 충격적인 사건의 죄책감이 그의 심리를 지배했기에 보호자에 대한 죄책감이 예전보다 희미해졌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 역시, 겉을 감싸는 요소들을 들어내 본질에 접근해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예시이다. 고전 텍스트여도 현대 사회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유의미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마무리하며


 

효라는 두꺼운 껍질 때문에 심청이는 아버지가 무엇을 원하는지, 심학규는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필자 역시 장애인 자립에 대해 무지했다면 본 관점으로 텍스트를 분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심청전]은 현대의 관점에서 봤을 때 분명히 장애혐오적인 텍스트이다. 왕비가 된 심청이와 재회한 심학규가 눈을 뜨며 결말을 맺는데, 이는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채워 넣어야 할 결핍 요소로 본 것이다.

 

그렇기에 장애인권과 효 같은, 전근대에서 현대까지로 이어지지 않은 가치에 대한 교육이 꼭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심청전]을 접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학습자로서 문학으로의 가치와 현대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정신적 가치를 동시에 받아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관련 교육들이 선제된다면, 고전에서 파생될 수 있는 가치들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렇기에 문학 교육, 넓게 나아가서는 예술교육과 사회적 가치들은 유기적으로 얽혀 있어야 한다. 교육자가 아니기에, 필자는 단지 그런 교육이 이뤄지기 희망하며 이번 오피니언을 구성해 보았다. 이 글이 많은 교육자에게 읽혀지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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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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