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망각의 프로그램 - 시뮬라시옹

글 입력 2024.09.19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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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시뮬라시옹>은 발전하는 AI 기술과 사랑, 사람들 간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는 극이다.

 

연극은 비행기 사고로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선욱이 아내를 잊지 못하고 ‘시뮬라시옹 프로그램’에 가입하면서 시작된다. ‘시뮬라시옹 프로그램’은 ‘시뮬라시옹’이라는 단어 그대로 세상에 없는 생명을 AI 기술로 복원해 내는 프로그램이다. 복원할 때는 그 대상이 되는 인물의 정보를 입력해야 하며 데이터가 많이 누적될수록 현실과 가까운 인물의 모습이 그려진다.


선욱은 아내의 죽음 이후로 아내를 그리워하다 남몰래 ‘시뮬라시옹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눈에 비친 아내와 함께 행복한 생활을 이어가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에겐 여러 사건이 닥친다. 내가 생각했던 스토리와 달라 연극을 더 몰입하여 볼 수 있었다. 세상에 남겨진 인물이 어떻게 죽은 상대를 의식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지,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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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떠올랐던 단어는 ‘애도’였다. 선욱은 아내 상아의 죽음 이후 아내를 그리워하다 결국 아내를 복원한다. 그리고 입력된 데이터값으로 복원된 아내와 함께 행복을 누린다. 하지만 나는 그 행복이 현실이 아닌 가상에서 오는 가상의 행복이라고 느꼈다. 복원된 아내 ‘상아’는 선욱이 기억하던 아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선욱이 바라왔던, 그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데이터에 불과하다. 배터리가 떨어지면 오류가 나고 본인이 원하는 데이터만 넣어 만들어낸 가상인 셈이다.


선욱은 그런 상아에게 점점 더 많은 데이터를 입력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선욱이 몰랐던 상아의 외도와 상아의 감정, 그녀가 선욱과 결혼하며 느꼈던 생각을 알게 된다. 선욱의 상상 속 상아는 자신과 다른,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도 밝고 행복한 사람이었지만 죽기 직전 선욱의 일상에 살아 숨 쉬던 상아는 행복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데이터를 점점 더 입력할수록 상아의 모습은 선욱이 그리워하던 아내의 틀에서 점차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선욱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내의 데이터를 완전히 삭제 후 자신이 바라던 행복한 상아를 제 곁에 남긴다.


나는 이러한 선욱의 행동이 그가 애도의 시간을 가지지 못했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았다. 비행기 사고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2034년에 일어났고 비행기도 수습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간다. 그 시간 속에서 선우만이 혼자 남아 상아를 그리워하고 기다리고 떠올린다.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르지 못했던 선욱에게 상아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시뮬라시옹 프로그램’은 애도의 프로그램이 아닌 망각의 프로그램과 같았을 것이다.


가상의 세계 안에서 현실을 망각하는 것. 눈앞에 상아가 있기에 선욱은 죽은 상아를 떠올리며 슬퍼하지 않았고 그녀를 애도하지 않았다. 죽음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 시간은 사람에 따라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으며 고통이 클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 선욱에게는 아마 그 시간이 길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선욱은 그 시간을 보냈어야 마땅했다. 죽은 이를 애도하며 자신의 현실을 살아야 했지만 결국 선우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 시간에서부터 도피하기 위해 ‘시뮬라시옹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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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란 무엇일까?


죽은 사람을 떠올린다는 것. 기린다는 것. 영원히 생각한다는 것. 죽음 이후 홀로 남겨진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 내가 관계를 맺는 사람이 죽는다면 그 관계는 거기서 끝나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죽어서도 지속되는 관계는 있다. 당장 선욱을 보아도 그는 죽은 상아를 떠올리며 그녀를 사랑했다. 당장 내 현실에 없는 사람이라도 관계는 지속된다. 그리고 애도는 그 관계를 내 마음속에 묻어두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천천히 내 마음속에 담아두는 과정. 그 사람이 현실에 없기 때문에 다시 볼 수 없더라도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추억, 모든 순간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과정. 애도는 그런 게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선욱에게 더더욱 필요했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욱은 아내 상아를 사랑하는데 사랑해서 놓지 못한다. 마음속에 묻어두지 못하고 자꾸만 꺼내 보고 싶어 한다. 애도할 땐 그 사람과의 추억을 마음속에 담아두면서 천천히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선욱은 ‘시뮬라시옹 프로그램’을 통해 그 현실에서 벗어나려던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잘못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은 ‘선욱이 과연 행복해질까?’하는 물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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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기억에 남는 건 ‘상아’라는 인물이었다. 선욱이 상상하던 상아와 실제의 상아는 정말 다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선욱이 상상하던 상아, ‘시뮬라시옹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 막 복원된 상아의 모습은 밝고 해맑은 사람이었다. 그때의 조명도 특히 기억에 남았는데 해맑은 상아가 등장할 때면 노랗고 밝은색의 불이 들어와 무대 전체가 밝게 물들어졌다. 반대로 데이터가 많이 입력된 실제와 가까운 상아를 볼 때면 파랗고 우울한 빛이 도는 색의 불이 무대를 잠식했다. 아마도 그건 상아의 모습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연출이었을 것이다.


선욱은 실제와 비슷한 상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상아를 그리워했음에도 실제와 비슷한 상아가 등장하자 거부하려 드는 모습이 모순적이어서 흥미로웠다. 그럼 결국에 선욱이 그리워했던 건 누구였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선욱은 상아가 죽고 나서야 상아의 데이터로 복원된 AI를 통해 상아의 진심을 전해 듣는다. 행복했다고 생각했던 결혼생활은 암흑이었고 이것저것 많은 활동을 한 상아는 선욱의 무관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발버둥 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을 상아가 죽고 나서야 알게 된 선욱도, 그럼에도 상아의 감정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모습도 인상 깊었다.

 

 

[김예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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