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시대의 반항아 (1)

글 입력 2024.09.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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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 by Yang EJ (양이제)]

 

 

사조(思潮)에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조에 반(反)하는 이도 있는 법입니다.

 

앞선 글에서 저는 프란체스카와 믹, 그리고 로버트 킨케이드란 캐릭터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저는 이 세 인물을 시대의 사상에 녹아들지 못한 인물로 규정했습니다. 특히 프란체스카와 믹은 현실에 순응하고 타협하는 인물로 분류했고, 진실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느냐 그렇지 못했느냐를 기준으로 둘을 비교했습니다. 한편, 시대의 조류에 어울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물살에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해 드릴 인물은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와 찰스 부코스키의 <우체국> 속 '헨리 치나스키'입니다.

 

먼저 '바틀비'를 살펴봅시다. 뉴욕 월 가에 위치한 한 변호사 사무실은 최근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처리해야 할 서류가 부쩍 늘어난 탓이지요. 사무실의 주인인 노년의 변호사는 결국 직원을 한 명 더 들이기로 합니다. 그렇게 주인공 바틀비가 등장합니다. 바틀비는 사무실에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않고 문틀에 서서 사무실 내부를 바라봅니다. 파리한 첫인상을 제외하면 바틀비는 꽤 좋은 일꾼입니다.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는 일이 없고, 매일 성실하게 맡은 서류뭉치를 처리합니다. 필경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일입니다. 정확함과 신속함만이 요구될 뿐, 주관이나 살가운 대화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기계처럼 글자를 옮기고, 또 옮길 뿐입니다. 변호사는 많은 분량을 빠르게 처리해 내는 바틀비를 좋아합니다. 오전에는 신경질에, 오후에는 실수를 연발하는 다른 두 직원과 달리 바틀비는 조용하며 옷차림도 단정합니다.

 

어느 날,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새로운 업무를 지시합니다. 한 명은 소릴 내어 문서를 읽고, 남은 한 명은 옮겨적은 서류를 그와 대조하여 오류가 없는지를 살피는 일입니다. 이 검토 작업은 변호사, 필경사 할 것 없이 사무실의 모든 직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임무입니다. 변호사 혼자서 서류를 확인하는 것보다 이렇게 둘씩 짝지어 확인하는 게 더 쉽고 빠르기에 사무실은 모든 직원이 검토 업무에 참여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변호사는 함께 서류를 검토하자며 칸막이 너머의 바틀비를 부릅니다. 그리고 바틀비는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며 이를 거절합니다. 이윽고 바틀비는 자신의 본업인 필경 업무를, 퇴실과 식사까지도 모두 하지 않는 편을 택하기로 합니다. 바틀비는 뉴욕 월 가의 절대법칙과도 같은 논리들을 부정합니다. 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이에 기대되는 권력관계, 권리를 얻기 위해선 먼저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회규칙, 더 나아가 사람은 일해야 한다는 통념 모두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바틀비는 변호사나 세상을 직접 비난하지 않습니다. 단지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것을 '하지 않는 걸로 택함'으로써 이들에 저항합니다. 바틀비의 저항은 행동이 아닌 무위(無爲)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변호사는 바틀비의 저항이 혼란스럽습니다. 뉴욕 월 가의 모든 행위는 '거래'를 전제로 합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인 의식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뜻한 빵을 먹기 위해서는 값에 맞는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몸을 데울 담요와 눈을 붙일 침대가 필요하다면, 이 역시 일정한 사용료를 지불해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집세를 낼 수 있는 사람만이 현관문을 드나들 수 있습니다. 지불할 능력이 없다면 잠시간 지붕 아래 비를 피할 순 있어도, 지붕 아래에서 거주할 권리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뉴욕 시민들은 자신의 시간을 바쳐 고용인으로부터 임금을 받고, 먹고 씻고 자고 입기 위해 헌납합니다. 하지만, 바틀비는 일하지 않고 변호사에게 사용료를 지불하지도 않은 채로 사무실에 칩거합니다. 강제로 변호사의 사무실을 쳐들어온 침입과는 다소 다릅니다. 바틀비는 직원으로서 사무실로 들어왔고, 직원 신분이 상실된 이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바틀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저항으로 월 가의 반항아로 자리매김합니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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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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