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눈을 감으면 생각나는 문장이 있나요? [도서/문학]

누구에게나 사적인 텍스트는 존재한다.
글 입력 2024.09.22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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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장 모으기를 좋아한다. 마음에 드는 문장들이 줄지어 이어지면 책 귀퉁이가 모조리 접히거나, 옆면이 포스트잇으로 도배되곤 한다. 그렇게 흔적이 많이 남고 손때 묻은 책은 정말 나만의 것이 된 기분이다. 성향에 따라 책을 깨끗하게 보존하고 전시해 두는 독자의 부류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정반대이다.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으면 연필이나 샤프로 밑줄을 쳐놓고 책장을 꼬깃꼬깃하게 접어둔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책에 대한 감정이 휘발될 때쯤이면 비로소 그 행적이 진가를 발한다. 과거에 남겨둔 표시를 따라가 보면 다시 몰입하기가 쉬워진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는 문장이 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동안 겪어온 삶의 경험이 깊이를 더해서 감칠맛이 배가 되기도 하고, 그때 밑줄을 긋던 자신의 심리 상태를 먼 시선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시간의 연속성 안에서 문장은 의미를 변해가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나에게 있어 좋은 문장이란 두 가지로 분류된다. 독자로 하여금 감정을 자극시켜 공감을 자아내거나, 너무나 천재적인 단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박수가 절로 나오는 문장들이 바로 이 글의 주인공이다.

 

전자의 경우는 문장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는 것이다. 머릿속에 돌돌 말려있어 알아볼 수 없었던, 사실은 무엇인지 알아볼 노력조차 하지 않던 마음을 문장이 보기 좋게 정리해준다. 그런 문장을 만나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가슴 한편이 후련해진다. 우선은 ‘그래, 이 말을 하고 싶었어!’하고 통쾌해하다가 시간이 흐른 다음엔 ‘나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었구나.’ 하며 안심한다. 형체 없는 소속감으로부터 위로받는다. 같은 생각을 가지는 부류가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막막하고 답답하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는 심정을 누군가와 같이 느끼는 것만으로도 다음 발을 내디딜 원동력을 부여받는 것이다. 그렇게 문장에 잠기다 보면 어느샌가 치유되고 가슴이 따뜻해져서 언제 그랬냐는 듯 에너지가 솟곤 한다.


후자는 인간의 창의성에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탄하는 것이다. 같은 인간의 뇌를 타고났으면서 어떻게 이런 훌륭한 문장이 나올 수 있는지 의아해하고 경탄한다. 그리곤 몇 번이고 입 밖으로 되뇌며 언젠가 나도 이런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헛웃음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문장에서는 마치 자체적으로 빛이 나는 것만 같다. 문장을 위해 책이 존재하는 것만 같은 경이로움을 느끼다 보면 문득 이 글을 만들어낸 작가 자체가 궁금해질 때가 많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이런 글을 내놓을 수 있었는가.


이 부류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경험에 의한 공감과 아름다운 창의성의 교집합, 그 어딘가에 문장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문장 속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문장 속으로 빠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의 내면을 투영한 사적인 문장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음악소설집: 수면 위로, 김연수 



 

한 달 정도가 지난 뒤에야 나는 내가 쓴 것들을 다시 읽을 수 있었다. 쓸 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 부끄러웠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자 새로운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일어난 일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사이에 그 일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노트의 여백에다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적었다. 그러면서 진실을 쓰는 일이 왜 중요한지 알게 됐다. 진실되게 쓴 문장들만 새로운 의미를 얻었기 때문이다.

 

81p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는, 빈 백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진짜 마음을 직시해 본 적 없는 사람은 거울 앞에서 실눈을 뜨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가림막이 없는 본모습을 마주하길 꺼리는 것이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애써 외면하곤 했다. 한자 두자 머뭇대며 써 내려간 것도 그다음 날에는 창피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무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금씩 바꿔나다 보면 점점 내 감정을 직면할 수 있게 된다. 슬프거나, 화가 나거나, 우울하다는 투박한 감정의 전말을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글에는 솔직해야 한다. 글을 쓰는 주체도 나이고, 앞으로 이 글을 가장 많이 읽을 주체도 나이기 때문에. 자신을 보여주는 행위에 관해서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진실되게 쓴 문장들만 새로운 의미를 얻었기 때문이다." 라는 문장은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속으로 내내 느끼고 있었던, 그렇지만 언어화해내지는 못했던 마음의 잔해물이었다. 진실을 쓰는 것만이 시간의 부식을 거쳐 살아남을 수 있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사랑의 단상 2014, 김연수



 

“월급에 목 매인 노예 인생이 별수 있나요? 취소하라면 취소해야죠.”

“노예 주제에 애당초 비행기표는 왜 끊어?”

“아직도 꿈이 많이 남아 있거든요. 그렇게 내 꿈의 일부를 타지 못한 비행기에 태워 보내는 거죠.”

권대리의 말에 갑자기 지훈은 말문이 턱 막혔다.

 

- 198p

 

 

이번 여름, 의도치 않게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채워진 일정과 약속들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점차 정신력이 고갈되어 간다고 자각했다. 제대로 된 여름휴가 없이 보낸 날들이 아쉬웠다. 특히 이번 여름은 장마 아닌 장마로 비가 수시로 내렸고, 유일하게 날짜를 맞추어 가족들과 떠난 계곡에서는 비가 하염없이 내려 하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다시 한번 시간을 비워 여행을 계획하고 무언가를 실행하기에 기력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바다를 딱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으면.' 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재웠다.

 

그때 이 문장이 절실하게 떠올랐다. 지난여름, 권대리는 오키나와로 가는 비행기표를 예매했지만, 회사 일정으로 인해 미련 없이 취소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내년 항공권을 다시 예매하려는 그의 행동에 지훈은 가지도 못할 여행의 비행기표를 왜 예매하냐며 조롱의 어투로 대답한다. 그 부질없는 행위에는 권대리가 부여한 나름의 의미가 존재한다. 꿈의 일부를 타지 못한 비행기에 태워 보내는 것으로써 현실의 각박함을 이겨내고 있었던 것이다. 곁에서 오랜 시간 지켜본 직장 동료로서 그의 마음을 알 것만 같은 지훈은 말문이 막혀 대답하지 못한다.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류이치 사카모토 



 

그러나 뭐가 어찌 됐든,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은 역시 옳지 않은 일이구나, 하고 반성했습니다. 고집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자신의 가능성을 좁힐 수 있음을 통감했죠. 충분한 여유 시간을 갖게 되면서 처음으로 깨달은 사실이었습니다.

 

- 197p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고정 관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는 삶을 통해 얻어낸 일종의 빅데이터인 동시에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한 보호 수단으로 작용한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떠나보낼수록 점차 자신만의 장벽을 쌓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사전에 만들어 둔 선입견은 다가올 피해를 예측하고 더 커지기 전에 미리 방지할 수 있는 예측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측 수단은 시작도 전에 생각을 굳혀버리는 고집이 되기도 한다. 무언가를 직접 접해보기도 전에 피하게 되면 사건의 변수는 점차 줄어들게 되고, 결국 삶은 단조로워지고 만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며 좋고 나쁨을 미리 점찍어 두는 것보다 조금은 열려있는 마음으로 대상 자체를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아직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무궁무진하니 말이다.


나는 평상시에 ‘그럴 수 있지’를 많이 되뇌는 편이다. 그 말은 즉, 나와 다른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을 천성적으로 힘들어한다는 말이 된다. 스스로 예민한 축에 속한다고 생각하기에 나와 다른 것에 불만을 품으면 끝도 없이 괴로워진다. 따라서 의식적으로라도 그럴 수 있다고 다짐하는 것이 편하다. “모든 사람이 나와 똑같을 수는 없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그렇게 '그럴 수 있지'를 마음속으로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심신이 차분해져 있다. 사람과 상황을 0인 시선에서 바라보게 된다. 기저에 쌓아둔 배경이 존재하지 않는 무의 환경에서 다가오는 사건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다양한 기회들이 생겨난다. 내 가능성을 계속해서 꺼내볼 수 있게 된다.

 

 

 

중급 한국어, 문지혁


 

개인적으로 문지혁 작가를 좋아한다. 이 글에 소개된 작품의 모든 작가를 애정하지만, 작가의 명성에 신경 쓰지 않고 접한 초급 한국어와 중급 한국어가 유난히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이 한국어 시리즈는 다른 소설에 비해 조금 특이한 형식을 띠고 있는데, 작가와 같은 이름을 가진 '문지혁'이라는 화자가 학생들한테 강의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문학 글쓰기를 가르치는 픽션으로 흘러가는 글은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학생들에게 전하는 말은 곧이어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소설을 좋아하고, 관심 있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도움 되는 말이 많았는데, 그 문장들 속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단락을 뽑아왔다.

 

 

만약 A가 제대로 된 여행을 다녀왔다면 아마 A는 A’가 되어 있을 거예요. 작지만 분명한 변화를 겪게 되는 거죠. 진짜 여행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이야기는 결말에 변화가 들어 있어야만 해요. 작품의 주제, 작가의 최종 메시지가 거기 들어 있으니까요. 왜 직접 말하지 않냐고요?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지 않습니다. 그래선 안 돼요. 그저 주인공의 마지막 변화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독자와 관객에게 ‘보여 주는’ 거죠. 돈 텔, 벗 쇼. 앞으로 지겹게 듣게 될 말일 거예요. 말하지 말고 보여 줘라. 직접 들이밀지 말고 간접적으로 넌지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소설이란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하지 않는 거예요.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고요. 설명하거나 가르치려 들면 끝나는 거죠.

 

- 38p

 

 

제대로 된 여행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같이 떠날 사람을 구하는 것부터 여행지를 정하는 방식, 얼마나 길게 떠날 것인지, 어느 계절에 갈 것인지, 가서 무엇을 목적으로 할 것인지 등등. 익숙한 동네를 떠나 낯선 타지로 향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우리는 계획하지 않은 다양한 우발적인 사건을 겪는다. 문제를 해결해 나가며 당황하거나, 기분이 급격히 나빠지거나, 혹은 같이 간 일행과 싸울 수도 있다. 기한이 정해진 여행에서 많은 것을 겪고 몰랐던 것들을 깨우쳐 간다. 

 

영원할 것만 같은 여행에는 분명 끝이 존재한다. 낯선 타지에서 이방인의 역할을 마치고, 다시 집에 돌아와 언제 그런 날들을 누렸냐는 듯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나는 분명 달라져 있다. A에서 아주 조그맣게 붙은 ’로 조금 더 나아진 A'가 된다.

 

그러므로 발췌한 문장에서 얘기하듯이, 좋은 이야기는 여행과 비슷하다. 그 끝에 달라진 무언가가 존재한다. 메시지를 말하지 않고 보여주며 독자로부터 이야기로의 참여를 이끈다. 단순하게 일방적인 말하기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함께 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는 초대장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이야기는 일정한 분량 이상의 길이가 있어야 한다. 보여주기 위해서는 서술이 필수적이기에, 손님의 친절한 참여를 위해서는 글을 쓰는 작가가 우선 친절해져야 한다.

 

 


모순, 양귀자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가장 효험이 있는 법이었다. 당신이 겪고 있는 아픔은 그것인가, 자, 여기 나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어쩌면 내 것이 당신 것보다 더 큰 아픔일지도 모르겠다, 내 불행에 비하면 당신은 그나마 천만다행이 아닌가….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 188p

 

 

위로는 쉽지 않다. 슬퍼하고 있는 타인에게 다가서는 것은 어느 때보다 신중해야 한다. 절망이라는 구덩이에 빠진 인간을 손 내밀어 바로 꺼내기란 실제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말을 전해야 차츰 고개를 들어 올릴지 시간을 들여 고민해야 한다. 

 

위로에서 가장 쉬운 방법은 내 약점을 공개하는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일부러 들어내며 누군가에게 고백한다. ‘사실은 나도 이런 아픔을 겪었어. 근데 그냥 감춰두고 살아가는 거야.’ 약점 대 약점으로 사람을 위로하는 방식은 보는 사람에 따라 누군가의 심연을 함부로 엿본 것 같은 음침한 면을 내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점차 중요해지는 삶에서 내 불행을 드러내는 것 또한 용기가 필요하다. 타인의 불행을 들여다보는 것에도, 남에게 나의 불행을 기꺼이 보이는 것에도 모두 위로라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으면 불가하다. 그렇기에 조금은 추해 보일지 몰라도, 위로를 향한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가여운 인간만의 발상인가.

 

*

 

문장이 주는 힘은 대단하다. 내가 먼저 문장을 알아보고 소중히 여기다 보면 바쁘게 흘러가던 일상 도중에 불현듯 문장이 떠오른다. 당분이 떨어질 때 저절로 사탕을 찾게 되듯이 공허해질 때 나타나 은연중에 힘을 실어준다. 그렇게 마음에 담아놓은 여러 문장으로 많은 응원을 받았다. 사람이 미처 전하지 못하는 온기를 텍스트로부터 부여받는다. 새로운 문장이 내 삶에 등장할 순간을 고대하며, 책장 넘기기를 계속한다. 이 기회에 당신만의 문장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조유진.jpg

 

 

[조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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