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마음에 대한 미약한 마음 [도서/문학]

황인찬,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문학동네, 2023)
글 입력 2024.09.23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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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어떤 시대일까. 한 시대에 대한 정의는 그 시대가 품고 있는 가장 큰 의문에서 시작해야 마땅할 것. 요즘 우리의 주된 물음은 아마도 이것이다. ‘우리는 왜 소통할 수 없는가.’ 내 생각을 말할 수 없고, 당신의 의미를 전달할 수 없다. 소통의 방식은 다양해졌지만 소통의 단절이 오히려 가장 큰 걱정으로 드러난 시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저 모순된 문장은 우연히 어느 한 시집을 들춰보고 난 후에 생겨난 나의 짧은 고민이었고, 시집을 덮은 후에 모든 것은 더욱 차분해졌다.

황인찬의 시집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문학동네, 2023)을 읽는다.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하자
학교에서 봐

- 「당신에게 이 말을 전함」 전문
 
 
당신에게 무언가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 말은 아주 간절해서 간결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나의 말은 너무도 절실해서, 아마도 수화기 너머로 듣고 있을 당신에게는 이토록 짧게 전해질 수밖에 없는 것. “내일 하자”. 수화기를 사이에 둔 오늘은 안 된다. 내일 우리가 마주했을 때 이 말은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 그러나 내일 막상 당신 앞에 섰을 때, 그러니까 하루의 시간이 비어버린 사이에 이 간절함이 희미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자라난다. 어쩌면 나의 마음이 거절될지도 모를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할 테다. 소통의 날이 심판의 날처럼 느껴지는 이 공포감 앞에 무력해진 우리의 선택은 ‘도망’이다.
 
 
나에게는 변명이 많았지
현장학습을 하러 가는 날이에요
집에 급한 일이 생겼어요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진 않았지만

- 「학교를 안 갔어」 중에서
 
 
당신과 학교에서 만날 약속을 정했으니 나는 “일단 전철을 탔고 / 시를 벗어”난다. 그러나 밀려오는 공포감에 나는 뒤늦게 “변명”을 찾기 시작한다. 같은 전철에 탄 다른 사람들이 묻는다면 “현장학습”이니 “급한 일”이니 운운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진 않았”다. 마땅한 핑곗거리조차 꺼낼 수 없는 막막한 단절의 상황에서 나는 궁지에 몰린 듯 절망스러운 감정을 느낀다. 그 막연한 두려움 속에 당신에게 꼭 전해야 했던 말들은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할말은 없”다고 먼저 체념해버리기 전에 소통의 용기와 간절함을 유지하기. 그 어려운 일을 앞두고 내가 떠올리는 것은 “교실 뒷문을 반쯤 연 채 / 창가에 앉은 너를 하염없이 쳐다만 보던 날”(「왼쪽은 창문 오른쪽은 문」)이다. 그 강렬한 기억이 우리를 간절한 소통의 시간으로 무사히 데려다주길 바랄 뿐이다.

소통의 온전함은 어려운(혹은 두려운) 일이라는 것. 이것은 시대적 진단이다. 체념, 회피, 허례, 순응 등의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소통의 병증을 우리는 얼마간 앓고 있다. 소통의 난이도는 날로 상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우리의 의무감은 계속된다. 여느 병과 마찬가지로 치유의 첫 번째 단계는 증상의 정확한 진단이다.
 
 
여름빛과 함께
새 한 마리가 집에 들어온 것이다

그는 새가 들어와 무섭다며 야단이고
새는 온 집안을 종종거린다
무엇인가를 찾는 것처럼

그러나 새가 무엇인가를 찾는 일은 없다
그저 여기저기 들쑤실 뿐

- 「그 해 구하기」 중에서
 
 
어느 날 집에 무단 침입한 새 한 마리가 온 집안을 헤집는다. “무엇인가를 찾는 것처럼” 날아다니는 새를 보며 우리는 그 새의 목적이 무엇일지를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새에게는 목적이 없다. 비행 그 자체가 목적인 새는 “그저 여기저기 들쑤실 뿐”이다. 자유롭게 비행하는 새는 소통의 은유다. 우리는 우리가 마주한 누군가의 의미를 어쩐지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읽어내려 애쓴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불편한 마음을 참지 못해 “울기 직전의 얼굴”이 되기도 하고, 소통의 기회가 “스스로 나가기를 바라며” 공허하게 마음의 문을 열어버리기도 한다. 소통에 속하기 보다는 차라리 소통이 단절되기를 바라는, 소통의 필요가 없는 고요 속에 안주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언젠가부터 생겨난, 소통에 대한 막연한 공포. 우리의 증상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너는 멀리 떠나기로 결심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으로 그러나 주말이 끝나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 정도로만 먼 곳으로

… (중략)

기쁨은 이렇게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찾아온다

멀리 떠난 너는 죽음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너는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숨을 쉬었다 여전히 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너는 주말이 끝나기 전에 집으로 돌아갔다

슬픔은 바닥을 뒹구는 깨진 유리병 사이에 앉아 돌아올 너를 상상하고 있었다

- 「마음」 중에서
 
 
소통의 공포 앞에서 우리의 처방은 무엇일까. 우리는 숨을 막는 소통을 피해 어딘가로 떠날 결심을 한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지만 “주말이 끝나기 전에”는 돌아올 수 있을 만큼만 먼 곳이다. 일상의 굴레에서 잠깐만 벗어나는, 그러니까 완벽하지 않은 도망. 이 정도의 거리에서만 비로소 찾아오는 소통의 편안함이 있다. 그곳에서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새삼 감탄”할 정도의 대화가 있을 테다. 그것을 생각하는 일만으로도 “기쁨은 이렇게 /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찾아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런 순간이 오면 우리는 “여전히 두 사람이라는” 혹은 그 이상과 함께할 수도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돌아간 그곳에서 당신과 편안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소통의 공포는 타인을 알아차려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소통이 강요가 되는 순간, 나와 타인의 대화보다 나와 내 마음의 소통이 먼저 어긋난다. 그렇게 삐걱대고 곯아버린 마음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들어갈 자리는 없어진다. 그때 필요한 것이 ‘도망’이다. 도망이 항상 최선의 방법이 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늘 최악의 수가 되는 것 또한 아닐 테다. 우리의 마음은 빈 공간이 먼저 생겨났을 때 무언가 품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하게 열린다. 나약한 마음에 대한 미약한 마음의 배려. 그 사소한 일의 중요성을 어떤 시들은 가끔씩 진단해낸다. 그렇기에 소통을 위한 도구로써 우리는 시를 믿는다, 아니 우리는 문학을 믿는다, 아니 마음을 믿는다.

 

 

 

컬처리스트 명함.jpg

 

 

[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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